국제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다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 8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로 상향 조정했다. 한국경제 전반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평가는 비교적 양호하다고 할 수 있다. ‘양에 안 차는’ 성적이긴 하지만 2%대 성장을 이어가고 있고, 국가재정도 아직까진 상대적으로 튼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경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저출산과 급속한 노령화, 성장잠재력 하락, 경직된 노동시장, 약화되고 있는 산업경쟁력 등 여러 문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계부채를 빼놓을 수 없다.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경제 전체를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가계부채가 급증하고 있는 걸까?
1,250조원 넘어선 가계부채… 주택담보대출이 주 원인 가계부채는 한국은행에서 집계한다. 정식 이름은 가계신용이다. 가계신용은 가계대출과 판매신용으로 구분된다. 가계대출은 또 주택담보대출과 기타대출로 나뉜다. 주택담보대출(모기지론)은 집을 구입하면서 주택을 담보로 빌리는 돈이다. 기타대출은 가계가 주택구입 외의 목적으로 대출받는 돈이다. 판매신용은 신용카드나 백화점카드, 할부금융을 이용해 상품을 구입할 경우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지난 6월 말 현재 1,257조3천억원이다. 갓 태어난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국민이 1인당 약 2,437만원씩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3월 말(1,223조7천억원) 대비 33조6천억원(2.7%)이 늘었다. 1년전인 지난해 6월 말보다는 무려 125조7천억원(11.1%)이 불었다. 2분기 말 현재 가계부채1,257조3천억원 중 가계대출은 1,191조3천억원(전체 가계부채의 약 95%), 판매신용이 65조9천억원(약 5%)을 차지했다. 가계대출 중 주택담보대출은 527조2천억원으로, 주택담보대출이 전체 가계부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2%다. 6월 말 현재 가계대출은 전분기말 대비 32조9천억원(2.8%), 판매신용은 7천억원(1.1%) 각각 증가했다.
이처럼 가계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유는 뭘까?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주택을 사기 위해 빌리는 돈이 급증 추세다. 지난 2분기 주택담보대출은 17조9천억원 늘었다. 전체 가계대출 증가액(34조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저금리로 아파트 구입과 전·월세 대출이 늘어나서다.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연 1.25%)을 유지하면서 시중 자금이 집단대출 등을 통해 서울 재건축 단지를 비롯한 일부 부동산시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집단대출은 특정단체 내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춘 사람을 대상으로 개별심사 없이 일괄적인 승인에 의해 이뤄지는 대출이다. 가계부채가 늘면서 부동산시장의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지난 8월 전국의 주택 매매가격은 7월보다 0.07% 상승했다. 올해 들어 가장 큰 오름폭이다. 강남 재건축 단지가 이를 주도했다.
또 다른 이유는 저성장과 경기침체, 부실기업 구조조정 등이 이어지면서 자영업 자금이나 생계비 마련 등을 위한 기타대출 또한 증가했기 때문이다. 2분기 중 늘어난 기타대출은 9조9천억원에 달한다. 가계부채는 10년 전인 2006년 607조원이었다. 2013년 말 1천조원을 돌파하더니 2014년 말에는 1,085조원, 2015년 말에는 1,203조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추세다. 가계부채가 느는 것 이상으로 가계소득이 늘어나면 가계의 부채상환능력은 하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계의 부채상환능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8년 143.3%에서 2014년 162.9%로 높아졌다. OECD 회원국 중 8위다. 2008년 12위에서 네 계단 올라갔다. 미국이 금융위기를 당했을 2008년 당시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0%가 넘는다는 것은 가계가 벌어들인 소득에서 세금 등을 내고 남은 돈으로 빚을 모두 갚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정부는 가계부채의 속도조절과 구조개선을 위해 지금까지 여러 차례 종합대책을 내놨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가계부채 억제와 경기(부동산시장) 활성화 사이에서 곡예를 했기 때문이다. 2014년 경기부양을 위해 LTV(주택담보대출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를 완화한 게 가계부채 폭증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처럼 정부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가계부채 규모는 매년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지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했다. 거대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고,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는 부도직전 미국 정부가 가까스로 살려냈다. 금융위기의 진원지는 주택담보대출이었다. 미국 정부는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대폭 완화했고, 그 결과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가 무분별하게 이뤄졌다. 2006년 금리인상 등으로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원리금을 갚지 못해 파산하는 가계가 속출했다. 대출이 부실화되자 금융회사들이 무너졌으며, 돈이 돌지 않자 실물이 망가졌다.
정부 일각에선 주택담보대출이 대부분 우량대출이고 연체율도 높지 않기 때문에 부실위험이 낮다고 주장한다. IMF(국제통화기금)도 지난 6월 “한국의 가계부채는 높은 수준이나 거시·금융안정성에 시스템 위협을 가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반면 한국은행은 주택담보대출 급증세를 우려, 지난 9월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미시적 대책만으론 가계부채 급증세 못 잡아 정부는 일종의 대출총량관리제인 총체적상환능력(DSR; Debt Service Ratio) 심사시스템의 도입시기를 연내로 앞당기기로 하는 등 가계부채 대책을 강구 중이다. 또 중도금 대출에 대한 보증건수는 10월 1일부터 최대 4건에서 2건으로 줄인다. 하지만 미시적인 대책만으로 가계부채 급증세를 잡기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따라 올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가계의 이자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위기는 한순간에 온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그랬다. 가계부채 가운데 특히 위험한 게 저소득층의 가계부채다. 임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가계부채 대책은 저소득층의 소득향상과 서민금융 지원, 채무조정 방안과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전했다.
* LTV(Loan To Value, 주택담보대출비율)와 DTI(Debt To Income, 총부채상환비율)
부동산을 사기 위해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대출한도를 제한하는 제도. 부동산 거품 붕괴에 따른 위기 발생을 막기 위한 금융감독제도다. LTV는 주택 시가에 대한 대출금의 비율을 뜻한다. 예를 들어 LTV가 60%라면 은행에서 돈을 빌려 3억원짜리 주택을 살 경우 최대 1억8천만원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다. DTI는 총소득에서 부채의 연간 원리금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율이다. DTI와 LTV의 한도는 금융당국이 부동산시장 등을 감안해 정한다.
* 총체적 상환능력(DSR; Debt Service Ratio) 심사시스템
DSR은 가계가 연소득 가운데 실제로 얼마를 부채의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쓰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모든 금융권 대출에 대해 원금상환액과 이자지급액의 합계를 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DSR 심사시스템은 모든 금융권 부채의 실제 상환부담을 평가하는 것이 특징이다. DSR 심사시스템이 도입되면 개인대출이 까다로워져 가계부채를 억제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