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가을은 짧다. 엊그제만 해도 파랗던 나뭇잎이 노랗게 변하더니 이내 후두둑 저버린다. 한국의 가을처럼 울긋불긋 단풍 들 새도 없이 저 유명한 ‘음울한 겨울’이 삽시간에 들이닥치는 것이다. 동구의 가을이 축제로 들썩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역의 와인, 맥주, 호박 페스티벌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축제들이 넘쳐나며 짧은 가을을 만끽하는 것이다. 헝가리 한국문화원이 마련한 ‘2016 한국문화 페스티벌’도 그중의 하나다. 그러나 헝가리에 한국과 한국문화에 관한 또렷한 인상을 우뚝 새겨 넣은 축제라는 점에서 여느 페스티벌과는 사뭇 다르다.
전통공연 · 한식 등 다양한 분야의 한국문화 전파되는 헝가리
헝가리 역시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류 바람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이다. 2009년 드라마 <대장금>이 공중파에서 방영됐는데 당시 드라마를 본 사람은 헝가리 국민의 51.6%였다. 말하자면 전 국민의 반 이상이 드라마 <대장금>을 시청한 것이다. 이후로 <이산>, <동이>, <선덕여왕> 등의 사극이 줄줄이 방송됐고, 특히 ‘K-pop’ 열풍이 가세하면서 대중문화 한류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여기에 2012년 헝가리 한국문화원이 개원한 뒤로는 한국어, 전통공연, 시각예술, 클래식, 한식 등 다양한 분야의 한국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와 같은 한류 바람의 밑바탕에 다양한 분야의 한국문화 커뮤니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조사에서 헝가리 내의 한국문화 동호회 수는 모두 112개였다. 올해 국제교류재단에서 발간한 「지구촌한류현황」 조사에서는 170여개로 대폭 늘어났다. 인터넷에 그룹이나 카페를 열고 활동하고 있는 동호회 수가 이만큼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구 1천만명이 못 되는 남한 정도 크기의 나라에서 이 숫자는 엄청난 것이다. 동호회 수가 그 정도라면 실제 회원 수는 수십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문화가 일회성 공연이나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사람’을 남기고 이들에 의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올해 페스티벌에서도 이들 동호회의 활약은 아주 두드러졌다. 이들이 아니라면 정원 7명의 헝가리 한국문화원 직원들만으로 10월 1일 하루 6,500명이 참여한 이 페스티벌을 운영하기란 불가능하다. 부다페스트의 대표적인 실내체육관인 MOM스포츠센터와 야외 잔디밭에서 진행된 이번 행사는 총 30개의 부스와 15개의 공연, 전시회, 영화상영회 등 다채로운 행사로 꾸며졌다. 전통무용에서 서예퍼포먼스까지, K-pop에서 한국 바이올리니스트와 헝가리 집시밴드의 공연까지, 기아차에서 한국타이어까지, 국산 게임에서 연날리기까지 대중문화와 전통문화, 문화와 한국기업을 아우르는 자리였다. 이 모든 것의 거의 대부분을 헝가리 한국문화 동호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들었다.
페스티벌 한쪽에서는 헝가리 한국영화 동호회원들이 준비한 영화상영회가 진행되기도 했다. 영화 선택에서부터 헝가리어 자막작업, 관객 모집과 실제 상영까지 모두 헝가리인들이 준비했다. 헝가리 한국게임 동호회는 국내기업 엔씨소프트가 개발한 ‘블레이드앤소울’로 e-스포츠대회를 열고, 한국 게이머들의 전략을 분석하고 한국게임이 왜 강한지를 토론하는 콘퍼런스를 열었다. K-pop동호회 회원들은 스스로 아이돌 팬클럽과 K-pop댄스 동호회원들이 참여하는 콘테스트를 기획하고 조직해 실제 공연을 한다. 한국전통무용이 좋아 자기들끼리 모여 ‘만월’이라는 한국전통무용단을 만든 지방도시 데브레첸의 한국무용 동호회원들은 한복을 챙겨 입고 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 남짓 걸리는 부다페스트까지 와서 우리 춤을 췄다.
개방성과 세련미, 전통문화의 매혹까지 갖춘 한국문화
아는 것이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던가. 헝가리의 한국문화 동호회를 말할 때마다 필자는 헝가리의 대표적인 한국문화 동호회인 ‘무궁화 무용단’을 소개한다(이름자가 이러한 것은, 무궁화가 한국 국화여서가 아니라 헝가리 들판에 지천으로 피는 꽃 중의 하나이기 때문임). 이는 지난 2012년 한국문화원에서 한국무용 강습을 받은 헝가리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동호회로 회계법인 대표부터 교사, 항공사 승무원, 공무원, 맥주회사 직원, 대학생 등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 17명으로 구성돼 있다. 지난해 서울 국립국악원과 전주 전통문화관에서 한국무용 공연을 했을 만큼 실력 있는 친구들이다. 이들의 열정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가령 한국에 어느 동남아시아 국가문화원이 있는데, 거기에 한국인들이 매주 2~3회씩 가서 동남아 민속춤을 연습하고 스스로 무용단을 만들어 공연을 올리는 것과 같다고 말이다. 그럴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같은 현지인의 한국문화에 대한 열광은 같은 아시아권의 문화에 대한 태도와도 사뭇 다른 것이다. 헝가리의 경우에만 한정해서 말한다면 현재의 한국문화 동호회원들의 상당수는 일본문화 팬들이었다. 동시에 중국문화원격인 ‘공자학원’은 해마다 대대적인 물량공세와 인해전술로 대규모 페스티벌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자발적으로 즐기고 조직을 만드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현지인들은 일본문화는 매력적이지만 특유의 폐쇄성을 가지고 있고, 중국문화는 매혹적일 만큼 세련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국문화는 트렌드를 선도하는 문화이자 개방성과 세련미, 전통문화의 매혹까지 아울러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한류는 진화하고 있다. 초기의 한류를 K-pop과 한국영화 · 드라마가 이끌었다면 이제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있고 현지에 내린 뿌리도 더 깊어졌다. 이번 2016년 헝가리 한국문화 페스티벌에서도 또다시 확인하게 된 것은 ‘한국문화의 현지화’라는 한류의 한층 진화된 모습이었다. 그래서 헝가리의 2016년 한국문화 페스티벌은 현지인에 의한, 현지인의 한국문화 축제가 됐다. 콘텐츠는 한국문화이되 축제의 주체는 현지의 외국인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동유럽의 작은 나라에서 한류가 지속 가능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의 속성이 원래 그러하지 않았던가. 서로 다른 문화가 섞이고 스며들어 새로운 문화가 생성되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