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Elliott)이 다시 한판 붙었다. 엘리엇은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해 삼성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펀드다. 엘리엇의 이번 목표는 삼성전자의 장기 성장이나 기업가치 증대가 아닌 단기 수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삼성전자의 기업지배구조가 튼튼하지 않다는 점을 노려 ‘치고 빠지는’ 전략을 통해 ‘먹튀’하겠다는 뜻이다. 이번 삼성과 엘리엇 간 2라운드 싸움과 관련해 국내 기업들이 투기적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외국에 비해 부족한 건 아닌가 하는 지적이 나온다.
단기 차익 챙기기가 목표인 ‘주주행동주의’와 ‘기업사냥꾼’ 엘리엇은 미국의 억만장자 폴 싱어가 1977년에 만든 펀드다. 운영자산은 290억달러(약 32조원)로 알려졌다. 하버드 법학대학원을 나온 싱어는 약점이 있는 기업이나 국가를 물고 늘어져 이익을 챙기는 ‘냉혹한 독수리’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엘리엇은 지난해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 계획을 발표하자 “삼성물산 지분 7.12%를 갖고 있다.”며 합병 반대를 선언하는 등 삼성경영에 공격적으로 개입했으나 주주총회에서 패배했었다. 싱어는 임원 선임이나 교체 등 기업의 지배구조에까지 간여하면서 이익 극대화를 추구한다. 배당금이나 시세차익을 목표로 하는 일반적인 주주들과는 다르다. 예전에 KT&G를 공격해 단기에 엄청난 돈을 챙겨나간 칼 아이칸도 그랬다. 그래서 싱어나 아이칸 같은 이들을 주주행동주의자(shareholder activist)라고 한다. 주주행동주의자들은 경영진·이사회 교체, 회사가 가진 보유 자산 배분이나 매각·기업 분할 요구, 회사 매각이나 다른 회사 인수(M&A) 요구, 지배구조 공격 등의 수법을 활용한다.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주주들을 모아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을 벌이는 방법도 동원한다. 주주행동주의자들은 경영진에게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경영보다는 일부 주주들의 단기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도록 압력을 넣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하지만 때론 기업 경영진의 독단이나 횡포를 견제하고,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순기능도 한다.
엘리엇 계열의 블레이크캐피털과 포터캐피털은 삼성전자 이사회에 삼성전자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분할하고 지주회사와 삼성물산의 합병을 검토할 것, 삼성전자 주주들에게 주당 24만5천원씩 총 30조원 규모의 특별 현금배당을 할 것, 삼성전자 지주회사를 미국 나스닥 시장에도 상장시킬 것, 삼성전자 지주회사와 사업회사의 이사회에 사외이사 3명을 추가해 기업경영구조를 바꿀 것을 요구했다. 삼성전자를 쪼개 회사를 둘로 나누고 회사가 가진 현금 중 30조원을 주주들에게 나눠주며, 자신들이 추천하는 이사를 선임하라는 얘기다. 블레이크캐피털과 포터캐피털은 삼성전자 지분 0.62%(76만218주)를 보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업들이 경영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경영권 방어장치 절실해 국내 증권가에선 ‘삼성전자에 명분을 주면서 자신들은 실속을 챙기겠다는 전략’이라는 평가가 많다. ‘명분을 던져줬다’고 해석하는 이유는 삼성전자 분할, 삼성물산과의 합병 등이 삼성 그룹이 그리고 있는 지배구조 개편 시나리오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 주식을 0.59% 갖고 있다. 지분율을 높여 지배구조를 강화하는 게 절실하다. 엘리엇의 주장대로 삼성전자를 투자회사(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나누면 주주들은 현재 갖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을 두 회사에 각각 동일한 만큼 보유하게 된다. 올 상반기 기준 삼성전자의 최대주주는 7.43%를 보유한 삼성생명이고, 오너 일가가 4.84%, 삼성물산이 4.18%, 삼성화재가 1.3%를 갖고 있다. 자사주(12.8%)를 제외한 삼성측 지분율은 18.15%인 반면 외국인 지분율은 50%를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엇 요구처럼 삼성전자를 인적분할하면 지주사는 자사주 12.8%만큼 사업부문 회사의 지분을 소유할 수 있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물산과 오너 일가가 가진 사업회사 보유 지분을 투자회사로 몰아주면 투자회사는 사업회사의 지분율을 30%대로 끌어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자회사 소유요건도 해결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주주 제안에 대해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내심 경계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30조원 특별배당이나 사외이사 3명 선임 등은 삼성으로선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만약 삼성이 제안을 거절하면 엘리엇은 언제든지 외국인 주주들을 우군(友軍)으로 끌어들여 삼성을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삼성은 행동주의가 공격하기 좋은 타깃”이라고 보도했다. 지난해에도 삼성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건을 놓고 엘리엣과 싸우는 바람에 한달 넘게 경영 공백이 생겼다. 소버린이라는 헤지펀드도 SK 그룹의 경영권을 위협해 약 1조원을 챙겨나갔으며 헤르메스 펀드는 삼성물산을 공격한 적이 있다. 왜 우리나라 기업들이 외국 기업사냥꾼들의 ‘먹잇감’이 되고 있는 것일까? 그건 우리 기업들에겐 적대적 위협에서 경영권을 방어할 장치가 외국보다 적게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은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에선 허용되고 있는 차등의결권주, 포이즌필, 황금주 등을 발행할 수 없다. 이렇게 투기적인 공격으로부터 취약한데도 정치권은 감사위원 분리선출, 집중투표, 다중대표소송 도입 등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뒤흔들 수 있는 상법 개정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헤지펀드와 기업사냥꾼들은 국제금융시장의 늑대와도 같다. 허점이 있으면 사정없이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국내 간판 기업들을 국제 투기꾼들의 먹이로 내주지 않으려면 정부와 정치권이 경영 투명성을 높이되 경영권은 안정시켜줄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방안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 적대적 M&A 방어 수단 경영권 위협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은 다양하다. 포이즌필(poison pill, 독약조항)은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이렇게 되면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기업이 지불해야 할 M&A 비용이 훨씬 커진다. 황금주(golden share)는 보유한 주식의 수량이나 비율에 관계없이 기업의 주요한 경영사 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식으로 적대적 M&A 대상 기업의 대주주가 황금주를 가지고 있으면 M&A가 힘들어진다. 차등의결권주는 보통주의 몇 배에 달하는 의결권을 가진 주식으로 역시 경영권 방어의 수단이 된다. 황금낙하산(golden parachute)은 임원 해임 때 거액의 퇴직금이나 스톡옵션, 보너스를 지급하도록 미리 정관에 명기해 공격자의 인수 부담을 늘리는 전략이다.
*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 행동하는 주주(activist shareholder)를 뜻하는 용어로 이익 극대화를 위해 임원 선임이나 교체 등 기업의 지배구조에까지 관여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