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뤼에르(Gruyeres)는 스위스 서부 프리부르(Fribourg) 주에 있는 아주 작은 중세 마을이다. 사아네(Saane) 강 위쪽 계곡 속 작은 언덕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아담한 이 마을은 프리부르의 숨겨진 보석이다. 사실 ‘그뤼에르’라는 이름은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그뤼에르 치즈’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여행지로서의 매력은 신비롭게 감춰져 있었다. 최근 소도시 여행을 선호하는 이들에 의해 조금씩 여행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해서 그 신비로운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지만 스위스인들에게는 최고로 사랑받는 소도시로 손꼽혀온 지 이미 오래됐다.
그뤼에르는 프레 알프스(Pre-Alps)에 속하는 프리부르의 넓은 초원에 조그맣게 솟은 산기슭 언덕 가운데에 둥지를 틀고 있다. 전설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뤼에르를 세운 그루에리우스(Gruerius)가 학(프랑스어로 Grue)을 붙잡아 자신의 문장(紋章) 동물로 삼은 데서 그뤼에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제일 꼭대기에 13세기에 건설된 그뤼에르 성이 있고, 마을을 둘러싼 성벽과 중세의 성문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마을에서 유일한 광장이 있고, 중세의 집들과 교회가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스위스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건물들도 마을 곳곳에 있다. 부르 가 7번지(Rue du Bourg 7)의 작은 카페‘빨간 모자(Bonnet Rouge)’도 그중 하나다. 중세의 시간이 머물러 있는 카페에서 신선한 그뤼에르 치즈 샌드위치를 맛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다.
마을 입구에서 맨 꼭대기 성까지 도보 10분이면 닿을 작은 마을이지만 즐길 거리가 의외로 많다. 기차역 바로 뒤편에 스위스 3대 치즈 중 하나인 그뤼에르 치즈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다. 치즈 생산과정을 일일이 살펴보고 구매도 할 수 있다. 마을 맨 꼭대기에 위치한 그뤼에르 성에서는 콘서트와 다양한 예술작품 기획전시가 열린다. 성 안뜰에서 바라보는 프리부르의 넓은 평원과 알프스 산들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성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 왼편으로 독특한 박물관이 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 기거(Hans Rudolf Giger, 1940~2014년)의 박물관이다. 스위스 쿠어(Chur) 출신의 기거는 영화 <에일리언> 속 에일리언 캐마을릭터를 창조한 인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세계적 유명인사다. 1998년에 그는 이곳의 생 제르맹 저택(Chateau St. Germain)을 구입해 초현실주의 작품들로 가득 채운 자신의 박물관을 열었다. 고풍스런 중세 마을에 기괴한 초현실주의 작가의 박물관이라는 불협화음 같은 긴장은 그뤼에르만이 선사하는 독특한 매력이다.
박물관 바로 맞은편에는 에일리언을 테마로 한 기거 바(Giger bar)가 무심코 지나가던 여행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기거 바의 명물이라는 ‘에일리언 커피’를 주문하고, 지배인 자누(Jeannot)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는 파리에서 전시회도 하고, 그뤼에르 신문에 소개되기도 한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지역 유명인사였다. 한 잔 쏘겠다며 무지무지 독한 술 한 잔을 선뜻 부어주면서 원샷을 재촉한다. 입술만 살짝 대도 불이 날 듯 독한 술이었다. 그는 호기롭게 한 잔을 가볍게 비우더니 카운터 뒤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사진으로 담아둔 앨범을 가지고 와 내게 보여줬다. 바를 관리하면서 틈틈이 영감이 떠오를 때면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갑자기 그가 자기 앨범의 뒷면을 펼치더니 기념으로 남기고 싶다며 사인을 부탁해왔다. 한글로 사인을 남겼더니 무척이나 고마워하면서 기거 바 기념팔찌를 한 움큼 선물로 안겨줬다. 자누는 어느새 내게 마음 따뜻하고 정감 있는 친구로 다가왔다.
저녁이 되면 그뤼에르에는 독특한 향내가 퍼져 나간다. 바로 그뤼에르 치즈가 익어가는 향이다. 맑은 프레 알프스의 자연 속에 머물며 중세 마을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따스한 정을 나누는 친구를 얻고 스위스 최고의 그뤼에르 치즈 퐁듀로 두둑하게 배를 채우고 여유롭게 밤거리를 거닐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그뤼에르 여행이 풍성히 안겨주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