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도 생소한 길 위에 서면 또 다른 혹성에 불시착한 이방인처럼 낯설다. 낯설면서도 그 풍경이 낯이 익다. 그 낯섦과 낯익음의 경계를 오가는 감정선이 점점 고조에 달한다. 저 굽이를 넘어서면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가지 않은 길, 처음 가는 길이다. 마침내 도착한 부르고뉴 공국의 작은 마을, 스뮈르 앙 오수아(Semur-en-Auxois). 낯선 프랑스의 어느 작은 마을 풍경이 가슴속에 작은 행복과 기쁨으로 둥지를 튼다. 그 낯선 풍경 속으로 한 발자국 내디딜 때, 수많은 중세의 전설과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인 골목과 분홍 화강암으로 지어진 견고한 탑이 낯선 여행자를 맞아준다. 그 전설 같은 아름다움 속으로, 그 오랜 세월 가득한 미지의 세계 속으로 한 걸음 더 마을 가까이 다가서 본다.
스뮈르 앙 오수아는 여행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 있는 소도시다. 디종(Dijon)과 베즐레(Vezelay)의 중간 지점에 있는 스뮈르는 아르망송(Armanc on) 강가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가 이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였던 디종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스뮈르로 향했다. 부르고뉴의 완만한 들판과 푸른 목장을 건너간다. 외롭게 흘러가는 작은 강물도 지나고 오랜 세월 묵묵히 자라온 나무들과 드문드문 소박한 풍경을 자아내던 작은 마을들을 지난다. 동그랗게 말린 건초더미는 프랑스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을 보여준다. 완행버스라 그런지 중간중간 이름 모를 작은 마을마다 정차를 하고 한두 명의 마을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딱히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 시골이라 운전기사에게 스뮈르가 나오면 꼭 알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해두는 편이 좋다. 아르망송 강이 부드럽게 감싸안고 흐르는 이 평온한 중세 마을 스뮈르는 과거에는 요새화된 도시였다. 현재 옛 성은 거의 대부분 무너졌지만 높고 웅장한 탑들과 주된 성벽은 여전히 마을을 둘러싸고 당당히 서있다.
마침내 버스가 마을 앞 정류장에 멈추고 기사가 내리라고 말한다. 도로를 따라 예쁜 꽃들이 수놓아져 있다. 관광안내소 옆에 있는 바르바칸(Barbacane) 문을 통과하면 뷔퐁(Buffon) 거리가 마을 중심을 가로지른다.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과 해시계, 목조와 석조 가고일(gargoyle)이 인상적인 거리다. 오래전 시간의 어느 한 자락에 멈춰버린 듯 여행자의 발걸음도 드문 곳이다. 간혹 장을 봐오거나 산보를 나온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마저 반갑기만 하다.
작은 마을에 비해서 웅장한 노트르담 성당은 옛날 영화로웠을 종교 시대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노트르담 광장을 지나 마을 중심에는 중세의 향기가 그대로 살아 있는 네 개의 탑이 우람한 모습을 자랑한다. 단단한 분홍빛 화강암으로 건설된 탑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갈라진 틈 사이로 시간이 흘러들어 생채기를 입었다. 네 개의 탑을 한 바퀴 돌아보고 스뮈르에서 최고의 전망 포인트라고 추천하는 아르망송 강가로 향한다. 마을 주택 골목을 요리조리 걷다가 강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간다. 세월의 풍상이 그대로 내려앉은 피나르 다리(Pont Pinard)와 미님 다리(Pont des Minimes)가 조용히 흐르는 강물 위로 말없이 서있다. 아르망송 강변을 따라 마을에서 조금 멀어지면서 뒤돌아보면 마르고 탑(Tour Margot)과 스뮈르의 옛 집들이 그려내는 스카이라인이 너무나 아름다워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동화책 속의 한 페이지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눈부신 햇빛을 받은 붉은 지붕이 빛나고, 녹음이 우거진 강둑에는 새하얀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그냥 그 자리에 시선도 발걸음도 그대로 머무른다. 빠르게 흘러가던 시간도 멈추고, 분주하던 여행자의 발걸음도 멈추고, 일상에 쫓기던 분주함도 그곳에선 평온한 적막 속에 조용히 잦아든다. 저 높은 마르고 탑 꼭대기에는 금발의 긴 머리 라푼젤이 살고 있지는 않을까. 마법에 걸린 예쁜 공주가 자신의 잠을 깨워줄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저절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다시 정신을 차린 후 아르망송 강을 따라 걷다가 마을로 들어선다.
이번에는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가 알려준 길을 따라서 마을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졸리 다리(Pont Joly)로 향한다. 졸리 다리를 건너서 바라보는 풍경은 강둑에서 보던 풍경과는 또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다리를 건너 인적이 전혀 없는 오르막길을 좀 더 걸어본다. 스뮈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포인트에 금세 이른다. 새파란 하늘과 양떼처럼 떠있는 흰 구름 아래, 네개의 탑과 노트르담 성당의 첨탑과 중세 도시의 성벽과 붉은 지붕의 마을이 시간의 흐름에서 비켜선 듯하다. 이 아름다운 중세의 시간에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꾸 커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