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를 대표하는 도시이자 프라하보다 낭만적인 도시로 손꼽히는 체코의 숨은 소도시가 바로 체스키 크룸로프(Cesky Krumlov)다. 체스키(Cesky)는 체코어로 ‘보헤미아의 것’을 의미하며 크룸로프(Krumlov)는 ‘강의 활 모양으로 굽은 부분의 습지’를 의미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름다운 중세의 도시를 활처럼 휘어진 블타바 강이 S자를 그리며 흐른다. 이 도시를 감싸고 흐르는 블타바 강은 체코에서 가장 긴 430km의 강으로 슈마바 산맥에서 발원해 수도 프라하까지 이어진다. 아름다운 강과 중세 도시가 어울려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완성한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 남서쪽으로 200km 떨어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근처 조용한 숲 속에 있다. 체코가 공산국가였던 시절에는 그저 낡은 옛 도시에 불과했으나 199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300여개의 건물이 문화유산으로 등록돼있고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아예 없다고 할 만큼 중세의 시간에 머물러있는 곳이다. 영화 세트장보다 더 중세적인 느낌이 살아있어 영화 <일루셔니스트(The Illusionist, 2006)>와 <아마데우스(Amadeus, 1984)>의 배경도시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루셔니스트>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휘어잡는 마술사 아이젠하임과 황태자의 약혼녀 소피가 못다 이룬 옛사랑을 완성해가는 모험이 ‘보헤미아의 보석’으로 불리는 이곳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 도시는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혼재된 13세기 성(城)을 중심으로 형성돼있다. 13세기 남부 보헤미아의 비테크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고딕 양식의 성을 짓기 시작한 것이 체스키 크룸로프 역사의 시작이다. 그 후 5세기 이상 평화로운 발전을 이뤘다. 이 작은 도시는 중부유럽에서 어떤 손상도 없이 가장 온전한 형태로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신시가지 라트란(Latran) 거리와 구시가를 연결하는 ‘이발사의 다리’라고 불리는 라제브니츠키 다리(Lazebnicky Most)를 건너면 구시가가 시작된다. 이 목재 다리의 이름은 블타바 강의 왼쪽 제방에 있던 오래된 이발소에서 유래했다. 신분을 초월해 이발사의 딸을 사랑한 레오폴트 2세 황제의 서자가 살해당한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구시가 중심은 스보르노스티(Svornosti) 광장이다. 이 광장 주변으로 후기 고딕 양식의 성 비투스 성당을 비롯해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좁은 골목을 따라 아기자기한 전통 수공예품 상점과 개성 강한 카페가 가득해 구시가 산책을 즐겁게 한다. 클림트(Klimt)와 동시대 화가였던 에곤 실레(Egon Schiele)는 그의 유명한 데드 타운(Dead Town) 연작 풍경화와 어린 소녀 그림들을 이곳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그렸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음란하다고 쫓아냈다. 하지만 지금은 에곤 실레 미술관이 당당히 들어서 있다. 해마다 6월이면 르네상스 시대를 재현하는 다섯 꽃잎 장미축제(Five-Petalled Rose Celebrations)가 열린다. 마을 사람들 절반 이상이 르네상스 시대의 옷을 입고 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난다.
13세기에 건설된 체스키 크룸로프 성은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이다.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되면서 둥근 지붕의 탑과 회랑이 추가됐다. 영주가 살던 궁전과 예배당, 조폐소, 바로크식 극장과 야외정원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크룸로프 성의 플라슈티교(망토 다리)에서 바라보는 체스키 크룸로프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다. 완만한 블타바 강의 곡선과 붉은 지붕들이 모여있는 중세의 도시는 초록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한 폭의 장대한 풍경화다. 성 내부를 둘러본 후 성 뒤쪽에 있는 넓은 정원을 거닐면 마치 중세의 영주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바로크와 르네상스 양식이 섞인 정원의 다양한 조각상과 계단식 분수, 잘 손질된 나무와 꽃들이 만들어내는 질서정연한 공간은 충분한 휴식공간으로 다가온다.
체스키 크룸로프 성의 원통형 탑은 1257년에 처음 건설됐고 16세기에 재건축됐다. 높이에 따라 지름이 점점 좁아지고 외벽도 다양한 색채와 무늬로 채색돼있어 상당히 독특한 느낌을 준다. 160개의 계단이 있는 탑 전망대에 오르면 발 아래로 블타바 강과 도시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 멀리 성 비투스 성당이 견고한 바위처럼 우뚝 서있고, 굽이쳐 흐르는 블타바 강은 예나 지금이나 햇살에 빛나고 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체스키 크룸로프가 마음 깊숙이 추억의 한 페이지로 자리 잡는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