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을 마치고 1년 만에 돌아온 회사에서 마주친 동료들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육아의 어려움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잘 쉬다 왔냐” 묻는 말에 상처받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쌍둥이와 함께 1년에 걸친 감정수련 과정을 거치고 나니 그런 소리에 발끈하거나 속상해할 경지는 지났다.
당황스러웠던 것은 회사 사람들 태반이 내가 1년이나 자리를 비운 줄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대단한 환영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엊그제 본 사람처럼 지나쳤다. 간혹 오랜만이라며 인사하는 이들도 내가 1년 만이라고 밝히면 “벌써 그렇게 됐냐”며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만 굴러가는 정도가 아니라 내 빈자리는 티도 안 나는구나,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육아휴직을 마친 엄마들 중 상당수가 회사에 다시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은, 물론 나쁜 상사와 후진적 조직문화 탓일 테지만, 이런 감정이 그들을 더욱 위축시키고 제대로 싸워볼 힘을 갉아먹은 면도 있는 게 아닐까. 여전히 대다수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낼 엄두를 못 내는 데에는 이런 ‘사회적 자아 소멸’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도 한몫하는 게 아닐까.
좀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 나도 예전에 육아휴직을 다녀온 동료들, 1년 동안 해외연수를 다녀온 선배들을 보면 “벌써 왔냐”고 했던 것 같다. ‘당신이 없는 줄도 몰랐다’는 뜻은 추호도 없었다. 각자 출입처에서 외근을 하는 기자들의 업무특성상 빈자리를 알아채기가 더 어려운 면도 있다.
그러니까 회사에서의 시간과 집에서의 시간이 다르다고 이해하면 될 일 아닌가. 더구나 지난 1년이 어디 보통 1년이었나.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는 격변을 겪은 기자들의 1년과 집에서 아이들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놀아주기를 반복하며 보낸 1년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심리적 시간의 상대성 이론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지난 주말 아이들을 데리고 강원도의 한 리조트에 다녀왔다. 겨울이면 스키장으로 변할 산꼭대기에 토끼, 양, 염소, 다람쥐, 닭, 오리 따위를 모아놓은 작은 동물농장이 있었다. 두어 달 전에도 과천 서울대공원 어린이동물원에 다녀왔던 터라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당시 쌍둥이들은 부모의 기대와 달리 동물들을 보고도 시큰둥했다. 그때 녀석들이 제일 좋아했던 건 급수대 수도꼭지였다. 끝도 없이 물을 틀었다 잠갔다 반복하며 급수대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이번엔 달랐다. 아이들은 동물 우리 앞에서 ‘꺅꺅’ 비명을 지르고, “기여어(귀여워)!”를 연발하고, 팔짝팔짝 뛰며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몇 주 전만 해도 길에서 마주치는 강아지 근처에도 못 가던 아이들이라 동물 줄 먹이는 사줄 생각도 안 했는데, 쌍둥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바닥에 흘린 먹이를 주워다 토끼 입에 넣어줬다.
바깥세상 못지않게 우리 아이들도 빠르게 변하고 있었던 게다. 남의 자식은 금세 졸업하고 금세 제대하고 금세 결혼한다더니, 매일 가까이 붙어 지내는 내 자식들의 변화에는 둔감했나 보다. 이제 출근 전에만 잠깐씩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있게 됐다. 아이들의 시간이 더 빨라지게 생겼다. 한눈팔다간 놓치는 게 많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