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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감탄고탄 맞춤법이것만 알아도 참 든든하다던데
박태하 출판편집자·작가 2018년 03월호



“죄송합니다. 바빠서 통화가 힘드니 이만 끊겠습니다”라고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말했건만, 상대방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유, 잠깐만요”로 말꼬리를 붙들더니 “세상에, 정말 어떡하시려고요” “사람 일 모르잖아요. 괜찮겠지 싶어서 가입 안 하셨든 분들 나중에 엄~청 고생하시든데” “이거 하나면 암이던 뇌졸중이던 다~ 커버된다니까요”를 속사포처럼 이어간다. 보험 판매를 위해 노력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건 좀 무례하지 않나. 하물며 그런 상대방이 ‘든’과 ‘던’을 마구 섞어 쓰기까지 하면 이렇게 되돌려 주고 싶다. “정말 어떡하시려고요.”
맞춤법을 비교적 꼼꼼하게 챙기시는 분들도 무심결에 지나치는 ‘든’과 ‘던’의 구분. 간단히 설명하자면, ‘든/든지/든가’에는 ‘선택’의 의미가 들어 있다. 쉽게 말해 ‘이거든 저거든’이라는 말이다. “내일은 개일걸?”이라고 잘못 말한(지난 호를 참조하자) 당신이 내일 마실 게 맥주 소주 막걸리 고량주, 곁들여 먹을 게 치킨이 삼겹살이 파전이 훠궈, 먹고 나서 춤추 노래하 집에 가서 잠을 자 밥을 또 먹 아무렴이다. 그게 뭐 상관없으니 얼마나 든든한가!?
반면 ‘던/던지/던가’에는 ‘회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 우연히도 발음이 비슷한 영어 단어 ‘done’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처럼 말이다. “많이 사랑했 사람이니?” “네, 얼마나 마음이 아팠지 스토킹을 할 정도로요” “예끼, 내가 널 그렇게 가르치?” 등의 문장에 쓸 수 있겠다. “많이 사랑했 조금 사랑했” “마음이 아팠지 몸이 아팠지” “그렇게 가르치 이렇게 가르치”과 비교해보자.
자, 그럼 여기서 퀴즈. “과거에 네가 무슨 짓을 했 상관없어”에 알맞은 글자는 뭘까? ‘과거’라고 냉큼 ‘던’ 하시면 제가 참 속상하다. 저 문장은 A를 했 B를 했 C를 했 뭐든 상관없다는 뜻이니 ‘든’이 맞는다. 꼭 선택지가 나열되지 않더라도 선택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때는 ‘든’을 써야 하는 것.
그러니 보험 마케터 분이 먹고사느라 고생을 하시 마시 “엄~청 고생하시든데”는 “엄~청 고생하시데”가 되어야 하고(그리고 “가입 안 하셨”이 되어야 하고), “고인이 돌아가신 이유가 혹시 암이던? (아니면) 뇌졸중이던?”이라고 물을 게 아닌 이상 “암이 뇌졸중이”이 되어야 맞겠다. 전화통 붙들고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 건 너무 이상한 사람 같고, ‘든’과 ‘던’을 잘못 쓴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큰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테니 “정말 어떡하시려고요”라고 말하는 건 너무 오버 같아서 “그만 끊습니다”라며 전화를 끊었다. 먹고사느라 애쓰는 건 바쁜 근무시간에 이런 전화를 받는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어떤 경우 든든하게 대비하는 건 좋은 일이다. 전국의 보험인들을 비롯해 비상시와 관련된 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라면 더더욱 기억하기 좋은 맞춤법이 아닐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가 누구 어떤 위치에 있었, 과거에 저질렀 성폭력에 대해서는 단호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어떠한 약자 마음 든든히 살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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