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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꽃보다 아빠레벨상승
유신재 한겨레신문 기자 2018년 03월호



스테인리스 팬 사용법은 지난해 육아휴직을 하면서 새롭게 익힌 기술 혹은 기능 가운데 하나다. 평생(?) 별 생각 없이 코팅 팬을 써왔지만, 쌍둥이 먹일 음식을 하다 보니 팬에서 유해물질이 나올 수 있다는 말에 신경이 쓰였다. 아내가 큰맘 먹고 일반 코팅 팬보다 훨씬 비싸고 무거운 스테인리스 팬을 사줬다. 스테인리스 팬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책(정말 그런 책이 있다!)도 함께 사줬다.
팬 바닥에 지저분하게 재료가 눌어붙을 때마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매번 다시 책을 펼쳐 실패원인을 분석하고 재도전에 나섰다. 몇 주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홈쇼핑 채널에 나오는 코팅 팬처럼 깨뜨린 달걀이 흐트러지지 않고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팬 위에서 미끄러질 때 그야말로 희열을 느꼈다. 실제로 아이들 건강에 얼마나 영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스테인리스 팬을 사용할 줄 아는 남자가 됐다.
1년의 육아휴직은 스테인리스 팬 사용법을 익힌 이야기처럼 간단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훨씬 더 근본적인 ‘남자 업그레이드’를 가져왔다. 예전에도 부엌일은 도맡는 편이었으니 한국 남자치고는 제법 살림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1년 동안 육아와 살림의 최종 책임자로 지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집안일을 돕는 것과 집안일을 책임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육아와 살림의 최종 책임자는 당장의 끼니만 준비하지 않는다. 냉장고 속 재고와 유통기한을 늘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몇 끼 뒤 메뉴까지 설계한다. 그래야 버려지는 식재료가 없다. 설거지를 위한 세제는 충분한지 수세미는 너무 낡거나 더럽지 않은지, 식기건조대에 물때가 끼거나 곰팡이가 피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빨래통과 서랍장의 내용물을 늘 파악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세탁기를 돌려야 아이들 입힐 옷이 떨어지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는다. 쌍둥이들 손톱 발톱을 제때 깎아주지 않으면 쌍둥이들 얼굴이나 어린이집 친구들의 얼굴에 상처가 생기고, 어린이집 선생님으로부터 지적을 받는다. 아이가 아플 조짐을 보이면 담당 의사의 진료 일정을 감안해 얼마나 더 두고 볼지, 언제 병원에 갈지 판단한다.
하나하나 사소한 일인 것 같은데, 지속 가능하게 이런 일들을 이어간다는 게 쉽지 않았다. 당면 과제를 수행하면서도 다음을 위해 늘 인프라를 점검하고 중장기 과제를 염두에 두는 일상이랄까. 한때 아내가 불만을 제기할 때 “이만하면 잘하는 것 아니냐”고 마음속으로나마 대들었던 게 미안하다.
자영업자라면 모르겠으나 현대의 직장인들은 대개 최종 책임자 구실을 하지 않고도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고도로 분업화된 회사가 그런 역할을 요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니 회사에서 유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흔히 사소하게 여겨지는 육아나 살림을 유능하게 해낼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년에 걸친 수행 끝에 최종 책임자의 자세가 제법 몸에 배었나 보다. 나보다 먼저 퇴근하는 아내는 세탁기에 넣어둔 빨래를 잊고 쌍둥이들과 함께 잠들곤 한다. 나한테 얘기를 해준 것도 아닌데 집에 들어가면 이미 일을 마친 세탁기가 자동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아침에 일어나 깜빡한 빨래가 떠올라 다용도실로 뛰어갔다가 건조기에서 잘 마른 빨래를 확인한 아내는 남편이 꽤나 기특한가 보다.
설 명절이 지나니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투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 집은 참 평온한 명절을 보냈다. 그렇다고 이제 마음을 놓을 일은 아닐 게다. 지금도 조금만 방심하면 스테인리스 팬 위의 계란노른자가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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