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성폭력 통계를 만드는 것을 어렵게 하는 이유가 낮은 신고율만은 아니다. 성범죄의 특징 중 하나는 범죄의 정의 자체가 논란이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나라마다 법률에 명시된 강간의 정의가 다르고 피해자를 대하는 사회 분위기도 달라서 국가별 통계를 바로 비교하기도 어렵다.
현직 검사의 성추행 폭로 이후 공직사회뿐 아니라 기업, 영화계, 대학 등에서도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성범죄는 피해자가 나서서 발언하지 않으면 드러나기 어려운 범죄다. 피해자가 힘들여 발언해도 가해자들은 “그런 적 없다”,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꽃뱀의 수작이다”라고 부인하면서 피해자를 궁지로 몰아넣기 일쑤다.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도 “왜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거부하지 않았느냐?” 또는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느냐?”라고 피해자에게 묻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사회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범죄 신고율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고 결국 숱한 범죄들이 영원히 묻혀버리고 만다. 어떤 범죄가 얼마나 일어나는지 소상하게 알려줄 통계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못하다.
성폭력 통계 대검찰청, 경찰청, 여성가족부 등에서 발표
성폭력 통계들의 출처는 대검찰청·경찰청·여성가족부 등의 기관과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의전화와 같은 시민단체들, 그리고 대학을 비롯한 연구기관들이다. 검·경찰에서는 강도, 살인, 성범죄 등을 묶어 강력범죄(또는 흉악강력범죄) 통계를 발표하고 있고, 여성가족부에서는 주기적 실태조사를 통해 성폭력에 대한 인식, 피해 실태 등을 조사하고 있다. 여성가족부의 보고서는 표본으로 뽑힌 사람들을 면접조사한 결과이며 학계의 연구 역시 대개 표본조사로 데이터를 얻는다.
검·경찰의 통계는 실제 사건의 수사기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정확성이 높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의 신고율이 낮다 보니 전체적인 범죄 실태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한편 여성가족부 등에서 발표하는 표본조사에서는 전국적인 피해 실태와 더불어 성폭력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에 이르기까지 많은 내용을 조사할 수 있지만 민감한 질문이 포함되는 조사에서는 솔직한 응답을 얻기 어려울 수 있다. 가령 2017년 여성가족부의 보고서를 보면 7,200명을 조사한 결과 2016년 한 해 동안 강간·강간미수 범죄 피해를 당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이 결과를 보고 한국이 강간범죄 청정국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편 시민단체에서 발표하는 통계는 피해자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담고 있지만 상담 결과만을 갖고 만들어지기 때문에 전체적인 성폭력 실태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확한 성폭력 통계를 만드는 것을 어렵게 하는 이유가 낮은 신고율만은 아니다. 성범죄의 특징 중 하나는 범죄의 정의 자체가 논란이 된다는 점이다. 강간이 대표적인 사례다. 상대를 흉기나 폭력을 동원해서 무력화시키거나 위협한 경우만 강간으로 볼 것인가,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했는지를 보고 판단할 것인가, 또는 피해자의 상황과 주장을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등에 따라 강간은 좁게 또는 넓게 정의되고 통계수치도 크게 달라진다. 게다가 데이트 강간이나 대학의 캠퍼스 강간처럼 아는 사람한테 피해를 당하는 경우에는 보통 피해자는 강간을 당했다고 하는데 상대방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나라마다 법률에 명시된 강간의 정의가 다르고 피해자를 대하는 사회 분위기도 달라서 국가별 통계를 바로 비교하기도 어렵다.
이처럼 정확한 성폭력 통계를 만들기 어렵다고 그런 통계의 활용도가 낮을까? 그렇지는 않다. 여성운동이나 성폭력반대 운동단체 등에서는 종종 성폭력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피해자 수가 많다는 통계를 강조한다. 언론에서도 ‘성폭력, 여성 5명 중 1명은 평생 한 번 이상 겪는다’(『한겨레』, 2017. 2.)와 같은 기사제목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성폭력을 가급적 덜 중요한 문제로 인식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제법 있는데 이들 역시 꽤 적극적으로 통계를 활용하고, 그들 중에는 강간을 지나치게 넓게 정의하기 때문에 통계가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여성이 알아서 처신하면 성폭력은 피할 수 있다?
사실 과거 우리나라 법원에서도 피해자가 폭력과 위협 속에서 강력하게 저항하지 않았다면 강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피해자의 입장을 점차적으로 반영하는 방향으로 법률이나 법원의 판결, 그리고 통계도 변해왔다. 게다가 기술발달에 따라 몰래카메라 촬영과 같은 성범죄가 새로 추가되기도 했다. 이처럼 시대 변화와 다양한 비판과 해석 속에서 법과 사회도 바뀌고 통계도 바뀐다.
하지만 아직 통계가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거울 앞을 가리고 있는 장막들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는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의식을 짚어보고 싶다.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2016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보고서」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감당해야 할 따가운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7,200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이라고 답한 사람이 49.3%에 달했으며 ‘여자들이 조심하면 성폭력은 줄일 수 있다’고 답한 경우 역시 48.7%나 됐다. 심지어 ‘여자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차를 얻어 타다 강간을 당했다면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답한 사람이 54.1%였으며 ‘여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면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면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도 44%나 됐다고 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성폭력을 여성이 알아서 처신하면 피할 수 있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피해자가 사회를 믿고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드러내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게 범죄가 감춰질수록 범죄자는 안심하고 범죄를 거듭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곧 범죄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하다가 어렵게 자신이 당한 피해를 증언한 사람에게 우리 사회가 줘야 할 것은 비난과 책망이 아니라 든든한 격려여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