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멀고도 낯설었다. 여행의 이정표로 삼을 만한 특별한 무엇이 없었다. 파리의 에펠탑이나 로마의 콜로세움, 런던의 빅벤처럼 그 도시를 친숙하게 여길 만한 어떤 무엇 말이다. 그러나 지난겨울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도시가 탈린이다. 탈린은 랜드마크를 섭렵하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여행하는 곳이었다. 탈린의 백미는 올드타운인데, 동화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파스텔 톤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돌길을 거니노라면 시간 위를 거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만난 것 같기도 했고,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거대한 영화 촬영장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중세와 현재가 한데 뒤엉켜 있는 탈린의 올드타운은 랜드마크가 없어도, 특별히 할 일이 없어도 마냥 좋았다. 오래된 도시의 속살을 헤집으며 온종일 골목길을 쏘다니는 것만으로도 탈린은 여행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오래된 도시들이 즐비한 유럽에서는 올드타운이라 불리는 구시가를 잘 보존하고 있는 도시들이 많다. 근대에 이르러 도심에서 확장된 부분이거나 아예 새롭게 구성된 도심 말고, 수백 년 전부터 있어온 오래된 도심을 지키고 보호하는 게 유럽의 보편적인 정서다. 재개발과 난개발이 횡행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오래되고 낡은 것들을 새것으로 바꾸는 데 열심인 반면 유럽 사람들은 오래된 것일수록 더 좋아한다. 한국의 도로를 가만히 보면 오래되고 낡은 차가 잘 없다. 주기적으로 새 차로 바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은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오래된 자동차가 자랑거리다. 유럽의 도시 하면 떠오르는 고풍스러운 이미지들은 대부분 올드타운에 속해 있는 것들인데, 올드타운이 잘 정비된 곳은 여행지로서도 인기가 좋다. 최근에 불었던 크로아티아 여행 열풍의 실체는 두브로브니크의 올드타운이고, 한결같은 인기를 자랑하는 체코 여행 또한 프라하의 올드타운이 핵심이다. 올드타운은 그 도시의 정체성을 간직한 곳이고, 역사가 기록돼 있으며, 문화가 새겨진 곳이어서 단기간에 도시의 정수를 만나야 하는 여행자 입장에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올드타운을 얘기하면서 절대 빠트릴 수 없는 곳이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눈물겨운 올드타운일 것이다. 2차 대전이 끝을 향해가고 있을 때 나치에 점령당한 바르샤바에서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전쟁과 지배를 지속하려는 나치군의 광기 어린 제압은 바르샤바를 초토화시켰는데, 폴란드의 국가적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악의에 가득 찬 파괴였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폐허로 변해버린 바르샤바를 시민들은 결의에 차서 재건에 나섰다. 근대에 지어진 건물들이야 다시 지으면 그만이었지만, 수백 년 된 건물이 즐비했던 올드타운의 파괴는 뼈아픈 일이었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올드타운을 복원해야 했던 시민들은 수년에 걸쳐 벽돌 하나까지 철저한 고증을 거치며 원래의 시장, 주택, 성곽, 교회 등을 전쟁 이전과 ‘똑같이’ 재건해냈다. 기어이 시간을 되돌려 놓은 것이었다. 올드타운을 복원하는 것은 전쟁의 시간을 지우는 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재건 사례로 꼽히는 바르샤바의 올드타운은 다른 나라의 재건 사업에도 큰 영감을 주었고, 하나의 기준이 됐다. 지금 바르샤바 올드타운의 전망대에 올라가면, ‘새로 만들어진 원래의 올드타운’이 한눈에 들어온다. 피와 땀과 눈물이 한데 얼룩진 재건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올드타운을 복원한 그때의 바르샤바 시민들이 함께 보이는 듯해서 저절로 숙연해진다.
탈린과 바르샤바의 올드타운, 두브로브니크와 프라하의 올드타운은 모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세계유산이란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유산’이라고 한다. 이렇듯 올드타운이란 인류 모두의 것이다. 과거에 산 사람들의 것일 뿐만 아니라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것이고,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가는 도시의 옛것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란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유네스코가 나서서 증명한다. 한국에 뉴타운은 넘쳐나도 올드타운이 없다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나이 든 사람을 뜻하는 말 중에는 ‘노인’ 말고도 ‘노신사’라는 말이 있다. 노인에 신사라는 말이 더해진 말로, 멋있게 나이 든 사람을 뜻한다. 노신사가 되려면 평소 쌓고 다듬어온 교양이 있어야 한다. 세상의 여느 오래된 도시가 노인이라면, 올드타운은 노신사다. 어차피 나이를 먹어가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올드타운을 닮은 노신사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먼 곳을 여행하고 또 여행하는 것이다. 교양을 체화하는 데는 여행만 한 것이 없으므로. 여행과 올드타운과 노신사라는 단어를 입속에 넣고 가만히 읊어본다. 나에게 좋은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