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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월부(月賦) 책을 산 그날
김용택 시인 2018년 08월호


그날도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심심하였다. 내가 공부하던 곳은 산골 마을에 있는 작은 분교다. 학교는 산을 등지고 앉아 있고, 산이 빙 둘러싼 분지 같은 곳에 마을이 몇 개 있었다. 아이들은 3학년까지만 있었다. 4학년부터는 산을 하나 넘어 들을 지나 면 소재지 학교로 다녔다. 마을은 깊은 곳에 있어서 독립된 작은 나라 부족 같았다. 나는 그중에서 제일 작은 마을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저학년이기 때문에 오전만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놀았다. 분교여서 사무도 없었다. 분교장이 학교 일을 거의 도맡아 했지만, 일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월급은 학교 일하는 분이 본교에 가서 타왔다. 할 일이 별로 없는 선생님들은 마을에 내려가 마을 사람들과 윷놀이도 하고, 민화투도 치고 놀았다. 나는 작은 도랑에서 고기를 낚기도 했다. 오후는 길고, 밤은 더 길었다. 시간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아, 시간이 있구나. 시간이 남아돌아 가는구나. 그렇게 몇 개월을 지냈다.
어느 날 학교로 양복쟁이 두 명이 찾아왔다. 학교에 손님이 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본교에서 교감 선생님이 올 때도 있지만, 그것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교무실도 없었다. 복도도 이상하게 교사 안에 들어 있지 않고, 교실 밖에 있었다. 비바람이 불면, 비가 복도까지 들이쳤다. 할 일도 없어서 나는 복도에 의자를 내다 놓고 앉아 있었다. 그 양복쟁이들이 작은 운동장을 지나 나에게 왔다. 다른 선생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내게로 다가온 그들이 내 앞으로 이상한 책자를 내밀었다. 책을 팔러 왔다고 했다. 그 작은 책자에는 책 사진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알고 보니, 책을 소개하는 팸플릿이었다. 책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전집이었다. 전집이란 말을 처음 들어봤다. 같은 제목의 책들이 30권인 전집도 있었다. 우아하고 화려하였다.
나는 놀랐다. 책도 놀라웠지만, 한 달에 얼마씩 주면 된다는 월부(月賦)라는 말도 생소하고 놀라운 말이었다. 나는 그중에서 제일 멋진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사기로 했다. 두려웠다. 책을 사다니. 그래도 욕심이 생겼다. 그리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멋졌다. 며칠 후에 책을 가져왔다. 가슴이 뛰고 뭔가 두려웠다. 방학이 되었다. 나는 밖에도 나가지 않고 한 달 동안 그 7권의 전집을 다 읽었다. 놀라웠다. 책을 7권이나 읽어버리다니. 그리고 개학이 되어 학교에 갔더니, 그 사람이 이번에는 「헤르만 헤세」 전집을 가져왔다. 밤을 새워 읽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 생각이 정리되고, 생각이 앞산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어 생각을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생각이 일기가 되고, 나중에는 그 생각들이 정리되어 시가 되었다. 처음에는 시를 써놓고 나도 시인지 뭔지 몰랐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내가 쓴 시를 나는 이해했다. 또 얼마 지났더니, 내 시를 다른 사람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책을 사보기 시작한 때부터 딱 13년 후였다. 주위에 시를 쓰는 사람도 시를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 책장사는 나에게 계속 책을 가져다주었다. 앙드레 지드도 이어령도, 서정주, 박목월도 그가 전집으로 가져다주었다. 그 작은 시골 분교의 월부 책장사가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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