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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통계, 세상과 소통하다‘평균적인 한국인’은 누구일까
조재근 경성대 수학응용통계학부 교수 2018년 09월호



지난 7월, 서울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데이터와 통계학을 주제로 학생들에게 특강을 했다. 대학에는 통계학이나 데이터를 전공하는 학과들이 따로 있지만 고등학생들은 대개 수학 교과서의 확률과 통계 단원을 통해 통계학을 만나다 보니 통계학을 어려운 수학의 하나로 치부하고 멀리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듯하다. 만날 기회가 드문 만큼 통계학 교수로서 고등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이번에는 특히 열정 넘치는 도서관 사서선생님 덕분에 특강에 참여할 학생들이 적어낸 의견과 질문을 미리 받아보고 강의를 준비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의 전공 분야 선택을 앞둔 고등학생들은 역시 진로, 적성, 통계학 분야와 빅데이터의 미래 전망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도 그렇지 무더운 7월의 한복판, 기말고사를 막 끝낸 학생들에게 딱딱한 통계 강의라니! 얼마나 매력 없어 보였을까? 그런 마음을 이렇게 퉁명스럽게 적어낸 학생도 있었다. “통계학에 대해 정말 관심을 갖고 특강을 듣겠다고 참가신청을 한 학생이 얼마나 될까? 아마 거의 없을 것 같다.” 이 솔직한 의견은 그날 특강을 시작하는 좋은 실마리가 돼줬다.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통계, 개인의 고유한 특성 지워
우리가 통계를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에는 거의 모든 통계가 집단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도 있을 테다. 게다가 통계는 사람이나 세상사를 숫자라는 매우 추상적인 표현으로 압축해버린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사회통계를 생각해보자. 실업률, 자살률, 출산율 등의 통계들은 복잡한 현실을 간단한 숫자로만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이런 통계에서 정작 진짜 사람은 볼 수 없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누구나 개성을 가진 다른 존재들이고 그런 개별적인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하므로 사람들의 고유한 특성을 지워버린 통계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집단의 데이터를 요약하기 위해 가장 널리 쓰이는 방법은 역시 평균일 것이다. 평균은 어떤 통계보다도 계산하기 간단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어떤 경우에는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에도 평균이라는 표현이 종종 붙는다. 가령 언론에서 ‘평균적인 한국인’이라는 표현을 쓸 때 그 평균은 신체치수나 소득, 재산 같은 특성뿐 아니라 사고방식, 심리, 생활방식 등에서도 전형적인 존재를 일컫는다. 이를테면 가장 평범한 보통사람이 국가대표가 되는 셈인데, 현실적으로 모든 면에서 평균에 부합하는 한국인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즉 ‘평균적인 한국인’은 통계가 만들어낸 일종의 가상적인 모형이라 보면 되겠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집단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평균을 강조하는 시기도 있었고, 반대로 평균에서 먼 작은 집단이나 개인들이 더 강조되던 시기도 있었다. 특히 19세기 통계학의 역사에서 그런 사고방식의 변화를 잘 볼 수 있는데 양쪽을 대표할 만한 인물로는 케틀레(A. Quetelet)와 골턴(F. Galton)을 꼽을 수 있다.
1830년대부터 약 반세기 동안 유럽통계학을 지배했던 벨기에의 케틀레는 사회를 대표할 전형적인 존재를 중요시해 평균적인 인간(평균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한편 19세기 후반 영국의 골턴은 평범한 사람들은 사회발전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우수한 사람들을 특별히 강조했다. 다윈의 사촌인 골턴의 입장은 계급 갈등과 유럽 나라들 사이의 제국주의 경쟁이 격화되던 시대적 분위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특히 골턴은 우생학의 창시자로서 역사에 뚜렷하게 이름을 남겼다. 우생학이란 우월한 사람들은 더 많은 자녀를 낳게 하고 열등한 사람들은 혼인과 자녀출산을 제한해 더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운동으로,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엄연한 과학으로 대접받았다. 우월하거나 열등한 사람을 판별하는 문제, 부모에게서 자녀로 형질이 유전되는 과정 등이 모두 통계학의 문제다 보니 20세기 초 현대통계학의 문을 연 사람들 중에 칼 피어슨(Karl Pearson)이나 피셔(Ronald Fisher)처럼 적극적인 우생학 지지자들이 많았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시대는 우생학의 시대?
필자가 7월에 만난 고등학생들은 모두 똑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내용을 배우고 같은 급식을 먹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렇게 공부하다가 같은 날 같은 시험으로 평가받고 등급이 매겨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미래야말로 특색 없는 평균적인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날 만나 학교식당에서 시원한 국수와 햄버거 급식을 함께 먹었던 학생들은 4차 산업혁명을 비롯한 시대변화를 잘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 새로운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고민의 바탕에는 특출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은 장차 로봇보다 낮은 대접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 고등학생들의 고민에서 알 수 있듯이 진부하고 획일적인 평균을 강조한 케틀레는 오늘날 매력 없는 인물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케틀레의 이름을 잊어도 될까? 그렇지는 않다. 케틀레가 살았던 시대는 오늘날의 4차 산업혁명 못지않은 거대한 혁명의 시대였다. 그런 배경에서 케틀레의 통계활동이 대표한 것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고 차별 없이 대해야 한다는 정신이었다.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사고가 없었다면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생활을 국가가 돌봐야 한다는 20세기 복지국가의 아이디어도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은 21세기다. 오늘날처럼 평범한 사람 대신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는 개인이나 집단만 각광받는 시대는 불평등과 격차가 매우 커질 수도 있다. 한때 과학으로 인정받던 우생학은 노골적인 배제와 차별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학살과 같은 참혹한 과거를 남긴 채 20세기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해버렸다. 만약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불평등과 배제, 그리고 차별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면 학생들이 살아갈 시대는 100년 전 우생학의 시대와 유사하게 퇴행할지도 모를 일이다. 학생들을 만나 통계학과 빅데이터, 인공지능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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