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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드리고의 여행 한 페이지사진을 찍지 않는 사진사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18년 09월호

 

 

 

며칠 전 인터넷 매체의 가십 기사를 하나 보았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에서 사진 찍기 좋은 명당을 차지하려고 여행객끼리 난투극을 벌였다는 내용이었다. 두 여행객의 언쟁으로 시작된 다툼이 동행들 여럿이 뒤엉켜 주먹이 오가는 큰 싸움으로 번졌고, 끝내 현지 경찰이 개입해 다들 연행됐다고 한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기사를 읽었다. 거기라면, 그럴 만도 하지. 트레비 분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분수일 것이다.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트레비 분수는 그리스 신화 속 바다의 신 ‘넵튠’을 형상화한 조각상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분수다. 트레비 분수를 등지고 돌아서서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다시 로마에 올 수 있고, 두 번 던지면 연인과 사랑이 이뤄진다는 속설을 품고 있어 로마를 찾은 방문객은 한 번쯤 들리게 되는 명소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도 동전을 던진 곳이니 오죽하랴.

처음 트레비 분수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 위용에 놀라 입을 딱 벌리고 한참을 서 있어야만 했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분수의 고고한 자태 때문만은 아니었다. 분수대에 면한 작은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에 놀라서였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문전성시를 이뤘고 분수대 바닥에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형형색색의 동전들이 그득했다. 트레비 분수는 실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슈퍼스타였다. 그리고 그 슈퍼스타를 친견하러 온 사람들은 제각각 카메라를 한 대씩 들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전문가용의 크고 무거운 카메라든 여행하며 들고 다니기에 좋은 콤팩트한 카메라든 아니면 그냥 스마트폰에 달린 카메라든.

이름난 여행지라면 카메라를 든 여행객들로 항상 붐빈다. 언젠가 뉴욕에 출장을 갔을 때 잠깐 여유가 생겨 뉴욕 현대미술관을 방문했다. 인상파에서부터 다다이즘까지 근현대 미술의 걸작이 즐비하기로 유명한 미술관이다. 작품을 다 보기엔 시간이 모자랐으니 가장 애타게 보고 싶었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부터 관람을 시작해 시간이 되는 만큼만 작품을 보고 나올 심산이었다. 매표소에 줄을 서서 기다리며 뉴욕에 미술 유학 중이던 친구에게 전화해 물었다. 고흐 그림이 미술관 어디에 걸려 있냐고. 친구는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더니 아주 시시하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정확한 답변이었다.
“5층이 인상파 작품들을 모아놓은 곳이야. 거기에 가면 사람들이 유난하게 몰려 있는 곳이 있을 거야. 그냥 5층에 도착하면 딱 느껴질 거야.”
그랬다. 5층에 갔더니 멀리서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고흐가 자살하기 1년 전에 남긴 천하의 걸작, 당시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그대로 화폭에 투영돼 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이미 카메라를 든 여행자들에게 빼곡히 둘러싸여 있었다.
바야흐로 우리 모두가 사진사인 시대다. 집집마다 장롱 속에 필름 카메라 한 대를 고이 모셔두었던 것이 그다지 오래된 추억이 아닌데, 요즘은 한 집에 카메라 여러 대가 마구마구 넘쳐난다. 우리 모두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스마트폰만 해도 매우 훌륭한 카메라 아니던가. (나는 영상과 사진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고가의 장비를 다루기도 하지만 스마트폰 카메라의 성능을 매우 신뢰한다.) 카메라가 그렇게 흔해져서인지 사진 찍는 일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닌 시절이다.
최근에 출판사와 미팅을 가졌다. 무동력 운송 수단인 카약, 자전거, 산악스키로 극한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책으로 내기 위해서였다. 출판사 대표가 충격적인 제안을 했다. 사진을 싣지 말고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사진사인데. 머리가 띵해지며 어찔해지는 소리였다. 내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러나 대표의 논리는 너무나도 설득력이 있었다.
“요즘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때문에, SNS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여행 사진이 넘쳐나요. 이제는 사진이 여행의 차별점이 될 수 없어요.”
결국 출판사 대표의 말에 홀려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말았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일이었다. 사진을 찍지 않는 사진사 말이다.
나는 3년 동안 아시아 전역을 여행한 일이 있는데, 그때는 한창 젊었을 때라 묵직한 전문가용 카메라 두 대를 메고 다녔고, 혹시나 현지에서 필름을 구하지 못할까 봐 항상 100개가 넘는 필름을 배낭에 챙겼다. 카메라는 이만저만한 짐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는 사진사의 숙명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일 뿐이었다. 카메라가 좋다고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진 찍는 사람의 태도가 좋은 사진을 만든다. 좋은 사진이 좋은 여행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어온 끝에 깨달은 것들이다.
유럽과 북미를 중점적으로 여행하는 최근의 나는 무거운 카메라를 내려놓고 일반인들이 쓰는 콤팩트한 카메라 두 대를 가지고 다닌다. 카메라의 무게와 여행의 즐거움은 반비례한다. 성능이 전문가용만 못하니 아쉬운 순간들이 많긴 해도, 줄어든 카메라의 무게만큼 여행에 더욱 충실할 수 있으니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그까짓 사진 좀 못 찍으면 어떤가. 나 말고 다른 여행자들이 좋은 사진 많이 찍었을 텐데.
욕심을 내려놓는 일이란 참 만만치 않아서 콤팩트한 카메라라고는 해도 여전히 두 대를 쓴다. 훗날 남미를 여행할 때는 딱 스마트폰만 들고서 여행하려고 한다. 가벼움이 가져다줄 여행의 환희를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 아프리카를 여행할 때는 스마트폰마저 내려놓고 노트와 펜을 들고 다니며 글만 쓰고자 한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완전한 여행의 자유를 만나는 일. 그것이 사진사인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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