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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감탄고탄 맞춤법기분은 가라앉아도 식욕은 드높여서
박태하 출판편집자·작가 2018년 10월호



명절 연휴는 다들 잘 지내셨는지. 자고로 추석 연휴가 끝나면 아, 이제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하면서 시무룩해지는 것이 대한민국 직장인의 이심전심.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기분이 추욱 쳐지기 십상이지만 그러지 말자. 물론 기분이 ‘처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만, ‘쳐지는’ 건 기분은 물론이거니와 맞춤법까지도 처지는 거니까.
이번 호는 의외로 많이들 틀리시는 ‘처’에 관해 살펴보자. 기분이 가라앉았을 때는 물론이고, 무언가가 아래로 늘어진다거나, 다른 것보다 뒤떨어지거나 할 때는 ‘쳐지다’가 아닌 ‘처지다’를 써야 한다. “매년 피부가 축축 처져ㅠㅠ”, “걔가 실력이 좀 처지지”처럼 말이다. 같은 이유로 ‘뒤처지다’가 맞는 말인데, 꽤나 많은 분들이 ‘뒤쳐지다’를 표준어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하다. “물건이 뒤집혀서 젖혀지다”라는 뜻의 동사 ‘뒤쳐지다’가 따로 있긴 한데, 아마 ‘뒤쳐지다’를 쓰는 8만개의 사례 중에 7만9,999개는 ‘뒤처지다’를 잘못 쓴 경우일 거라고 장담한다.
‘마구’나 ‘많이’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처’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처먹다, 처마시다, 처박(히)다, 처넣다, 처닫다, 처담다, 처엎다 등의 단어에서 ‘처’ 대신 ‘쳐’를 잘못 쓰는 경우가 그야말로 부지기수. 보통 복잡한 발음을 간단하게 뭉뚱그린 편을 좇기 마련인데, ‘처’를 버리고 ‘쳐’를 쓰는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우리의 화끈한 민족성 때문인지, 팍팍한 우리네 삶 때문인지 무언가를 쳐야만 직성이 풀리나 보다…는 오버고, 아무래도 ‘센’ 단어들이다 보니 막 치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 하지만 ‘마구’나 ‘많이’를 뜻할 때는 ‘처’를 써야 한다는 걸 기억해두자. 그것이 이토록 친숙하고 입에도 짝짝 붙는 단어들에 대한 예의다. 그리고 친한 친구가 “나잇살 쳐먹고 뭐하는 짓이냐”라고 구박하면 “너는 나잇살 처먹고 ‘쳐’ 좀 처쓰지 마라”라고 대꾸해주자.
한글날이 속한 달에 이 무슨 속된 말이나 가르치고 있냐고 못마땅해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매년 한글날에 “곱고 예쁜 말을 쓰자”라는 식의 주장이 나오는 게 더 못마땅하다. 그런 건 (행여나 하더라도) ‘한국어의 날’에나 할 말이 아닌가 말이다. 한글은 ‘언어’가 아니라 ‘글자’다. 한글날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위정자가 백성들을 위해 창제한 글자, 그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인정받는 글자를 위한 날이지, ‘처쓰지 마라’라는 말을 ‘사용하지 맙시다’라고 바꿔 쓰는 날이 아니다. 감사하기 그지없는 우리 세종대왕님도 욕은 하고 사셨단다.
“어차피 ‘한국어의 날’도 따로 없고 요즘 언어 문제도 심각한데, 이참에 같이 묶어서 좋게 좋게 넘어가면 어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내세우는 주장이 사람들로 하여금 ‘한국어’와 ‘한글’도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거야말로 한국어에 민폐 아닐까. 언어의 가치와 본령은 ‘곱고 예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있는 거니까.
말이 좀 샜지만, 그리고 말이 좀 셌지만, ‘한글’ 제대로 쓰자는 맞춤법 코너에서 한글날을 맞아서 못할 얘기도 아니겠다 싶다. 자, 처진 기분 추스르고, 맛있는 거나 와구와구 처먹으면서 힘을 내자. 처지는 뱃살은 나중에 생각하자. 천고마비의 계절 핑계를 처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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