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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만화 한번 그려볼래요?
김보통 만화가 2018년 11월호



나는 일단은 만화가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거나, 그래서 성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지난 6년간 꾸준히 만화를 그려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온 책도 10권이 훌쩍 넘어, 신간이 나올 때면 이곳저곳 강연을 하러 가는 일이 잦다. 몇 년 새 만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서일까. 나 같은 만화가의 강연도 제법 많은 사람이 찾아주곤 한다. 감사한 일이다.
내 꿈은 만화가가 아니었다. 만화나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수능 성적에 맞춰 대학을 갔고 학부 성적에 따라 전공을 정했다. 회사에서 담당했던 업무 역시 그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서른셋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뒤 무엇을 해야 하나 막막한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만화를 그릴 기회가 있었고, 의도치 않은 선택이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져 운 좋게 아직 버티고 있는 것뿐이다.
강연이 끝나고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실망했다. 이해할 수 있다. 종잡을 수 없는 삶에서 필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지침일 테니까. 그래서 ‘나도 저 사람처럼 한다면 저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위안을 얻기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언가가 되기 위한 정해진 과정이나 비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큼 무언가가 되기에 큰 장애물은 없다. 물론 세상엔 다양한 ‘효율적 방법’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효율의 문제이지 필수의 영역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위해선 독학하는 것보다 교습을 받는 것이 빠르다. 하지만 특정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거나 특정 교수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어떤 브랜드의 바이올린을 사용한다고 반드시 바이올린 연주가가 되지는 않는다.
되려 그 과정을 충실히 거쳤음에도 목표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 때는 좌절감만 커진다. 하지만 나는 경제학을 전공한 바이올린 연주자를 알고 있다. 사회체육을 전공한 인사담당자를, 고등학교만 졸업한 광고감독을, 교대를 졸업한 배우를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말했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왔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것은 아마 “만화 한번 그려볼래요? 6개월만 그리면 되는데”라는 한 신생 만화사이트 담당자의 제안에 “돈만 주시면 한번 해보죠”라고 답한 때였던 것 같다. “만화가가 꿈이 아닙니다”라거나, “만화를 배운 적도, 그려본 적도 없습니다”라는 대답 대신 ‘무엇을 그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한번 그려볼까’라며 펜을 들었던 그 순간이 오늘의 나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역시나 이 글 또한 보는 이들에게 다소 허탈한 심정이 들게 할 것이다. 뭔가 확고한 의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들뿐이라 맥이 빠질 수도 있다. 나로서는 바라는 반응이다. 자격이나 노력에 대한 강박은 더 이상 강해져야 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좀 더 천천히, 힘을 뺀 채 되는 대로 살길 바란다. 되는 대로 살다 아무거나 되면 좋겠다. 그래도 괜찮고, 그것이 보통인 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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