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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문장들여기 ‘한창기’가 있습니다
김이경 작가 2018년 11월호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좋은 책은 좋은 책을 만나게 한다. 지난달에 소개한 「최후의 사전편찬자들」이 「특집! 한창기」를 만나게 한 것처럼. 「최후의 사전편찬자들」에 실린 브리태니커사전 편찬자 장경우의 인터뷰를 읽다가 십 년 전에 나온 책을 뒤늦게 찾아 읽었다. 창간 때부터 잡지 『뿌리깊은나무』의 열혈 팬이었던 오빠 덕분에 그 잡지와 발행인 한창기에 대해선 제법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내가 얼마나 아는 게 없으며 그게 얼마나 미안하고 한심한 일인지 깨달았다.
「특집! 한창기」는 한창기 사후 10주기에 즈음해 그와 직간접적 인연이 있는 쉰아홉 명의 추모 글을 묶은 책이다. 처음엔 이런 유의 책이 흔히 그렇듯 고인에 대한 미화와 상찬으로 가득한 책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두 번을 정독하며 자주 눈시울을 붉혔고 책장을 넘기지 못한 채 오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첫 일독에선 한창기를 읽었고 두 번째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읽었으며, 처음엔 한 사람이 일군 가늠키 어려운 성취에 감탄했고, 다음엔 이런 인물과 한 시대를 사는 행운을 누렸음에도 그걸 몰랐던 미욱함에 낯을 붉혔다.
한창기의 성취를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잠시 소개하면, 그는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의 발행인으로 한국 잡지사를 완전히 새로 쓴 사람이며, 구술사가 알려지기도 전에 ‘민중 자서전’ 시리즈로 한국에 구술사를 정착시킨 사람이며, ‘한국의 발견’으로 오래 맥이 끊겼던 한반도 지리지의 역사를 다시 쓴 사람이며, 한글 전용을 실천하고 토박이말을 사랑한 우리말 운동가며, 고미술의 새 지경을 연 골동 수집가며, 판소리·민화·잎차·한복 등 스러져가던 전통문화를 살려내고, 일본풍을 답습하던 디자인과 광고를 혁신하고, 편집권을 확립하고, 세일즈 기법을 혁신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한국 현대(문화)사의 많은 부분은 한창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나친 과찬이 아닌가 싶겠지만, 정치·경제·출판·언론·국어학·역사학·국악·미술·문화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증언하는 이야기를 읽고 나면 여기 열거한 것들은 그가 이룬 성취의 일부일 뿐임을 알 것이다.
벌교 출신인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데다 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그러고 서울대 법대를 갔으니 보통은 고시를 통한 입신양명의 길을 택하기 십상인데 그는 고시 대신 세일즈를 택했다. 이후 빼어난 영어 실력과 추진력으로 미국 본사를 설득하여 한국브리태니커 회사를 설립해 높은 실적을 올리면서 한국 문화를 세계화할 토대를 마련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의 ‘타께시마’를 ‘독도’로 고치고 13면에 불과하던 한국 항목을 한국인이 집필해 70면으로 늘린 것은 그 과정에서 일군 작은 보람이었다.
흔히들 인물이 없다느니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느니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말은 못할 것이다. 남 탓 세상 탓도 더는 못할 것이다. 한 사람의 그늘이 이리 크고 푸른데 나는 어찌 살아야 하나, 그 고민만 깊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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