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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희삼의 인적자본론탈진세대의 무한도전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교수, KDI 겸임연구위원 2018년 12월호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어떤 카드회사 TV 광고에서 한 배우의 아련한 눈빛과 함께 등장한 독백 문구다. 표정과 표현은 코믹 모드였지만 마냥 우습지는 않았다. 지쳐 있는 대중들에게 주었던 공감 때문이다.
번아웃(burnout). 일에 과도하게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피로감과 스트레스로 탈진, 무기력증, 자기혐오, 우울증, 직무 거부 등의 증상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체력, 정신력, 동기가 고갈된 상태다. 과도한 요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통제력이 낮을 때, 또는 노력에 비해 적은 보상을 받거나 그럴 것으로 예상될 때 겪기 쉽다.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직장인의 88.6%가 번아웃에 시달린다고 한다.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멕시코에 이어 2위인 한국을 ‘피로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학업·경쟁 스트레스 등 번아웃 유발하는 교육 및 사회 환경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OECD 국가 중에서 만 15세 학생들의 총공부시간은 한국이 독보적으로 길다. 그러다 보니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한국의 평균성적은 최상위권이지만, 공부시간당 성적은 최하위권이다. 상대평가체제에서 경쟁 압박이 낳은 장시간 공부노동의 비효율이다.
대학에 오면 좀 나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고등학교 때까지 학업 및 입시 스트레스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왔는데, 취업난 속에 스펙 부담을 느끼는 학생들은 또다시 학점 압박을 받는다. 더욱이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과학기술원(IST) 계열의 학교는 공부가 어렵고 과제와 실험도 많아 자칫하면 대학 4년을 고4,
고5, 고6, 고7처럼 보내기 쉽다. 필자의 수업에 참여한 수강생 중 한 명이 대학생의 번아웃에 관한 기말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오정원, 「GIST 대학생의 번아웃 실태 및 요인 분석」, 2018년 1학기 ‘교육의 경제학’ 기말 에세이). 선행연구와 본인의 생각을 바탕으로 설계한 설문지로 휴학생까지 포함한 본교 대학생들을 조사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어냈다.
첫째,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소진 정도가 높았는데, 구체적으로는 탈진·반감·불안이 냉담·무능력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는 학생들이 공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의 능력을 크게 불신하지 않음에도 학업에 지쳐 있고 반감과 불안감을 가진 상태임을 나타낸다.
둘째, 진로 결정과 관련된 자아효능감에 대해선 학생들이 진로를 준비하기 위한 행동보다는 진로 결정 자체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과학기술특성화대학에 입학한 학생들도 이런 상황이니, 일반대학 재학생들의 진로 결정은 더욱 막연하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져 진로보다는 진학 위주인 고등학교 진로교육 실태와 관련이 있다(장차 고교학점제가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촉매가 되길 희망한다).
셋째, 고등학교 때의 경험이 번아웃에 미치는 영향은 공부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경쟁의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즉 장시간 공부 자체보다는 경쟁의 압박감을 느끼는 상황이 만성적 탈진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는 압박이 없으면 더 오래 공부하더라도 번아웃이 덜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넷째, 개인이 체감하는 사회의 요구(학업, 과제, 영어, 논문 등)가 클수록, 또한 개인이 자신의 학업량과 주변 환경을 잘 조절하지 못할수록 번아웃을 더 크게 경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번아웃을 유발하는 것은 한국의 교육 및 사회 환경이며, 번아웃을 예방하기 위해선 근본적인 환경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에세이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당장 지쳐 있는 대학생을 위해 제시된 몇 가지 해결책이었다. 에세이를 작성한 학생이 설문조사에서 번아웃을 겪었지만 지금은 극복했다고 응답한 학생들을 추가로 심층 면담해 얻어낸 소중한 조언들이었다.


사례1. 진로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학고에 들어가 치열하게 경쟁함. 입시를 끝내고 과학도로서의 진로에 회의를 갖게 됐으며, 대학 공부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림. 그러던 중 교양 수업에서 조별과제를 하며 사람들과 만나고 토론하면서 다시금 의욕을 되찾게 됐음.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이 번아웃을 극복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함.

사례2. 고등학교 때의 경쟁에 지쳐 대학교에서는 무기력한 태도를 보임. 그러던 중 재미로 ‘무한도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고, 진로와 전혀 상관없는 분야임에도 흥미를 가지고 몰두하기 시작함. 후반에는 단순히 무한도전 프로젝트가 아닌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고 몰두하는 자신의 모습 자체에 보람을 느낌. 무한도전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그때의 마음을 유지하며 현재는 진로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

사례3. 모든 자유가 주어진 1학년 여름방학 시기에 번아웃을 가장 크게 겪었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고 매일 12시간 동안 자기만 했음.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가 참여하게 된 ‘무한도전 프로젝트’가 활기를 불어넣어 줬음. 창작 연극 프로젝트를 하면서 딴짓의 힘을 알게 되고, 그 후 자발적으로 다른 무한도전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됐음. 이런 경험들을 통해 “실패해도 괜찮아”라는 말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음. 그와 동시에 실패할까 봐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을 시도하게 됐고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상처같이 보지 못했던 면을 직접 마주하며 심리적인 불안을 해소하게 됐음.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활동을 통해 번아웃을 극복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새로운 활동은 굳이 학업이나 진로와 관련된 활동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유익한 정규 프로그램이나 수업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결국 번아웃을 이겨내기 위해선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통해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진로와 학업에 대한 부담감을 잠시 내려놓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활동을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딴짓, 탈진세대 학생들을 번아웃으로부터 구해내고 새로운 활력 갖게 해

번아웃 극복 학생들이 언급한 ‘무한도전 프로젝트’는 필자가 있는 GIST에서 2016년부터 매년 공모를 통해 선정된 팀들에게 소정의 프로젝트 활동비를 지급해 학생들이 해보고 싶었던 딴짓을 제대로 해보라고 격려하는 사업이다. 선정 심사는 엄격하지 않아 나름의 아이디어와 계획을 세워서 팀을 이뤄 신청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도전의 기회가 주어진다. 2016년 제1기 무한도전 프로젝트에 대한 내용은 이미 필자의 지난 칼럼(「딴짓이 필요한 이유」, 『나라경제』 2017년 2월호)에 소개한 바 있다. 그때 대학 첫 학기부터 학업 스트레스가 심해 필자와 상담을 했던 지도학생이 동료들과 무한도전 프로젝트를 기획해 벌인 딴짓이 많은 학생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면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2018년 제3기를 맞이한 무한도전 프로젝트는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갖는 자기주도적 딴짓 프로젝트로 자리를 잡았다. 올해는 14개 팀이 다양한 도전들을 해왔다. 로켓 개발 및 발사 프로젝트 팀 학생들은 3년째 도전을 이어오면서 항공우주공학 분야의 지도교수가 없는 환경에서도 이제 능동형 자세 제어 로켓 개발까지 진도가 나갔다. 팀원 소감문에 따르면 이들은 언제나 상상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개발 과정과 현장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동시에 ‘예상치 못한 실패 → (실패해서) 괴로움 → 해결책 모색 → (힘들어서) 괴로움 → 결국 해결’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해나갈 수 있는 끈기와 통찰력을 길러왔다. 망원경의 자동화 및 성능 향상을 목표로 하는 팀은 파인더 초점을 조절하는 나사의 자동 조정을 위해 기어와 스텝 모터를 이용하고 아두이노를 통해 제어하는 작업에 도전해왔다. 고사양 스피커를 직접 제작해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하거나 기증하는 프로젝트도 있었는데, 이 팀은 지난해에 이어폰을 직접 제작하는 프로젝트에 도전한 바 있다. 비싼 개인트레이너(PT) 대신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 자세를 관찰해 교정해주고 피트니스 계획을 관리해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팀도 있었는데, 이들은 시장성까지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귀여운 개와 고양이 캐릭터가 공성전을 펼치는 온라인 게임 개발팀은 스토리작업부터 디자인, 프로그래밍까지 스스로 해내고 있었다. 학생들의 일상적인 말투(자연어) 질문에 답해주는 지능형 챗봇(chatbot) 개발팀은 현재 교수님 연락처, 식단 정보, 학내 시설, 주변 날씨 및 미세먼지 등에 관한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데까지 나갔다.

  
대학 인근지역의 모든 음식점들에 대한 평가단 실사를 통해 수집한 리뷰 정보를 제공하는 프로젝트 팀은 사용자의 특성과 시간대 및 날씨에 맞게 메뉴를 제안하는 서비스를 위한 데이터 작업을 하고 있다. 직접 만든 다양한 디저트를 지역 아이들과 동료 학생들에게 제공해온 프로젝트 팀은 디저트를 먹으며 혼자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을 운영해 지친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다.
재미와 정보를 제공하는 짧은 영상들을 제작해온 팀, 연극의 지평을 넓혀 영어연극, 플래시몹, 국악연극에 도전하고 있는 팀, 자작곡을 만들어 연주하고 녹음해 음반 발매 및 음원 공개까지 추진하고 있는 팀은 기존의 영상·연극·밴드 동아리가 무한도전 프로젝트를 통해 발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영어 스피치 관련 동아리는 TEDxGIST 추진을 목표로 학생들이 연사가 되는 미니 강연들을 펼쳐왔다. 그리고 GIST에 재학 중인 외국인 학생들(주로 대학원생)과의 교류 증대를 목표로 활동해온 팀은 매주 한국어 강독회를 열면서 친분을 쌓아왔고, 한글날에는 한국문화 관련 O/X 퀴즈, 골든벨,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끝으로, GIST의 새로운 로고 디자인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팀은 학생들 대상의 설문조사를 통해 뽑아낸 키워드를 바탕으로 인공별, Gistar 고양이 등 몇 가지 시안들을 선보였다. 그중 “I gist you”는 설문에 응한 학생이 “나는 너를 지치게 하겠어”라는 뜻으로 제시한 말이라고 하는데, 빡빡한 학교생활에 지친 학생의 마음이 학교 이름을 새로운 동사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꿈보다 해몽이라고, 프로젝트 팀은 교육, 꿈, 열정 등 다양한 GIST의 교육 시스템으로 (학생들을) 지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풀이했다. 원뜻이 무엇이든 풀이가 어떠하든 중요한 것은 이런 다양한 딴짓들이 탈진세대 학생들을 번아웃으로부터 구해내고 새로운 활력을 갖게 해주는가에 있다.
답은 나와 있다. 엉뚱해도, 서툴러도, 실패해도 사람은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것을 할 때 힘든 줄 모르고 힘든 것도 더 참아낸다. 바쁜 와중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딴짓 하나를 더 얹었는데도 더 활기차다. 여럿이 함께하면서 협업의 힘과 재미도 느낀다. 자기주도적 딴짓을 통해 자아효능감을 회복하고 학업 의욕과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얻는다.
일전에 인사혁신처가 주관하는 세종청사 아카데미의 통합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한 중앙부처 공무원과 동행하게 됐다. 그분은 공무원의 창의성이 ‘중고딕 13’의 제약에 갇혀 있다고 했다(중고딕 13은 정부의 보고 및 보도 자료에서 현황이나 근거자료를 수치로 제시하는 부분이다). 항상 잘 정리된 통계자료나 구체적인 해외사례 등을 윗사람이 요구하다 보니 실무자가 진짜 혁신적인 제안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가보지 않은 길, 지금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과 관련된 정책 제안은 정리된 통계나 근거를 제시할 수 없으며,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미 뒷북의 소지가 있다. 그분은 공무원에게도 자기가 해오던 업무와 전혀 무관한 활동을 해보고 전혀 무관한 사람들을 만나고 와서 자기 생각과 직관, 일화적 사례를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도록 하면, 훨씬 더 창의적인 정책 입안과 집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중고딕 13의 근거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는 공무원에게도 무한도전 프로젝트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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