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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그해 9월, 비 오던 밤
황광해 음식평론가 2019년 02월호



다 끝났다. 2009년 9월이었다. 12명의 직원을 모두 내보냈다. 한두 명 남은 사람들은 ‘빚잔치’ 정리 팀이다. 회계 서류, 회사 정리 관련 서류 등을 모회사에 보내면 행정절차도 끝난다. 건물주를 만났다. 보증금에서 임대료를 제하고 두 달 더 머물기로 했다. 남은 직원들도 며칠 후면 모두 그만둘 것이다. 바깥에는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이미 혼자였다. 더러 빈 책상 위 컴퓨터에 파란 불빛이 깜빡거린다. 마치 구조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50대 중반이었다. 디지털 지도 만드는 일을 3~4년간 열심히 했다. 디지털 지도는 작은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열심히 했지만, 매출은 아주 적었다. 3년쯤 버텼을 때 위기가 왔다. 모기업이 ‘추가 자금 투입’이 불가능하다고 통지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명절을 앞두고 사무실을 접기로 했다. 직원들의 밀린 급료, 회사의 부채를 정리하는 조건으로 사무실을 닫기로 했다. 대표이사였던 내 급료는 이미 반 토막이 나 있었다. 몇 달째 미지급이었다. 그마저 받지 않기로 모회사와 타협했다. 호주머니에 천 원짜리 몇 장이 남았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힘들었다. 왜 망했느냐는 걱정 섞인 질문에 몇 번씩 같은 대답을 했다. 힘들었다. 한밤중까지 퇴근하지 않고 우두커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나가려고 해도 밥값, 커피값이 신경 쓰였다. 더러 집에도 가지 않고 철야 근무자들이 쓰던 침대에서 잤다. 아무 일도 없는 진공 상태. 온종일 누구도 만나지 않고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뭘 하지?”
며칠째 비가 오락가락했다. 책상 위에 식빵 몇 조각과 먹다 남은 우유가 있었다.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서늘한 우유의 냉기가 목구멍을 스쳤다. 지나온 날들이 문제가 아니다. 실패는 과거다. 문제는 남은 날들이다. 그래 우선, 상황정리부터.
돈은 없다. 그동안 죄다 까먹었다. 새로운 사업? 다시 투자를 받는다? 패장이다. 재취업? 출판은 이미 불경기다. 경력이나 나이를 감안하면 그마저 갈 곳이 없다. 도무지 할 일이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하고 일주일을 끙끙거렸다. 결론.
“나는 글을 쓸 수 있다. 책도 많이 만들어봤다. 대리 필자 경험도 있다. 이번엔 내 책을 내자. 돈이 없지만, 서울이라면 몇몇 식당들을 다녀볼 수도 있다. 예전 기자 노릇을 할 때부터 전국의 맛집을 많이 다녔다. 그걸 책으로 쓰자.”
낮에는 맛집을 다니고, 밤에는 사무실에서 인터넷 검색, 원고 작성에 매달렸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남아돌던 시간이 꼬리를 감췄다. 이듬해 초봄에 책을 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오래된 맛집 111」.
8천부가 팔렸다. 주변에서 맛 칼럼니스트, 음식평론가로 불렀다.
기자 노릇과 자료를 만지다가 3~4년간 디지털 사업으로 외도를 했다. 처절한 추락. 다시 자료 만지는 일로 돌아왔다. 대상이 음식, 맛집으로 바뀌었다. 그해 9월 비 오는 밤. 내 삶의 터닝 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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