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내내 T가 아팠다. 독감이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독감 미스터리(“올해 독감은 훨씬 심하대”라는 말을 20년 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들어왔는데 그렇게 매년 심해지는 추세라면 지금쯤은 독감으로 인류가 멸망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와 별개로 올해 독감은 정말 심해 보였다. 고열과 콧물, 우물 속에서 길어다 놓은 것 같은 깊은 기침과 싸우면서 T는 원고 마감과도 싸워야 했다. 매일 고통스러워하며 키보드를 겨우 두드렸다. 바로 곁에서 누군가 고통의 한복판에 있는 순간만큼 무력감이 밀려들 때도 없다. 나도 지독히 아픈 와중에 울며불며 마감했던 적이 있기에 그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통을 덜어줄 수는 없었다. 그건 온전히 아픈 사람의 몫이다. 감기 하나도 이럴진대, 더 막막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육체적 고통 못지않은 마음의 고통 앞에서도. 고통스러워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고통을 설명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고통이 내려앉은 곳마다 영혼이 부서져나갈 정도로 너무나 거대하고 절대적인데, 말로 옮겨보면 얼마나 상투적이고 흔한 고통처럼 들리는지. 내 귀에도 그런데 타인에게는 얼마나 그럴지. 결국 아무도 나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리란 걸 깨닫고 우리는 외로워진다.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다. 커다란 고통을 호소하는 누군가에게 머릿속을 뒤지고 뒤져 적당한 말을 골라 진심을 가득 담아 전해도 얼마나 상투적이고 흔한 위로가 되어버리는지. 나도 그렇게 느끼는데 상대는 얼마나 그럴지.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리란 걸 깨닫고 우리는 또 외로워진다. 그래서 고통은 ‘ㅚ롭다’. 괴롭고 외롭다. 오랫동안 인권활동가로 일하며 크고 작은 고통의 현장들을 지킨 엄기호는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라고, 제목에서부터 질문을 던진다. 그는 1부에서 가정불화, 막대한 빚, 아픈 몸, 사랑하는 이의 죽음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을 따라가고, 그들이 심리학 공부, 종교, 반려생물, 제도적 언어 등으로 고통에 맞서는 과정, 정확히는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맞서는 과정 또한 따라간다. 특히 그는 그동안 연구자들이 고통을 겪는 당사자들에게‘만’ 맞춰왔던 초점을 고통의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확장한다.
고통을 겪는 이에게 절망은 이 고통이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반면 고통의 곁에 있는 이에게 절망은 고통을 겪는 이가 그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곁에 서 있는 자신을 끝끝내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언젠가 절망에서 벗어나 곁에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힘을 내며 응답할 것이라는 희망이 무너지는 것이다. 응답하지 않을 사람의 곁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 p.239 이 빛나는 확장은 2, 3부를 거쳐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시작의 장소로서 고통의 ‘곁’, 고통의 ‘곁의 곁’을 새롭게 안내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고통의 지형도’를 그려나가다 보면, 우리가 왜 고통스러운지, 고통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기 쉬운지, 그 선택들에 어떤 치명적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는 만큼 우리는 고통을 견딜 수 있으므로. 우리는 대개 고통 속에 있거나 고통 곁에 있으므로.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이 맞닿을 때만 열리는 세계가 있으므로. 그나저나 이 책을 다 읽어갈 즈음 나도 독감에 걸렸다. T에게서 옮은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고통을 나누라는 건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