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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드리고의 카메라 로드긴장을 푸는 행위이자 생존 본능, 필수품이면서 작업 친구…너의 이름 ‘커피’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19년 02월호



곁에 꼭 커피를 둔다. 글쓰기든 촬영이든 생산적인 작업을 할 때면. 카페인이 집중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컵에 든 커피의 온도를 손으로 느끼며 코를 거쳐 입으로 가져가 조금씩 마시는 행위는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을 준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 일에는 각성과 이완이 함께한다. 각성의 힘으로 두어 문장 쓰고 나서 커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고르고 이완한다. 그러고는 다음 문장을 쓴다. 혹은 썼던 문장 몇 개를 지우거나. 촬영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 장면 찍고 나면 가장 먼저 커피를 담은 텀블러부터 찾는다. 커피 한두 모금 마시며 지난 장면을 점검하고 다음 장면을 구상하는 것이다.
카페가 흔하지 않은 나라로 출장 갈 때면 드리퍼, 프렌치 프레스, 모카 포트 등 커피를 만드는 온갖 도구와 원두를 챙겨간다. 극단적으로 짐을 줄여야 하는 탐험여행에서도 커피만큼은 포기하는 법이 없다. 무슨 유난인가 싶겠지만, 일종의 생존 본능이다. 나에게 커피는 기호식품을 넘어 필수품이 돼버렸으니까.
그런 내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건 몇 년 되지 않은 일이다. 주변에 카페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후에도 한참 동안 커피에 맛을 들이지 못했었다. 가끔 마실 일이 생기면, 이렇게 쓴 것을 왜 마시나 싶어 시럽을 듬뿍 뿌려서 마시곤 했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커피 맛에 눈을 뜨게 된 건 이탈리아 출장에서였다. 어느 드라마 촬영을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산간 지방을 가게 됐는데, 말도 못하게 빡빡한 일정이어서 딴짓할 틈이 없었고 산간 지방이다 보니 딴짓할 거리 자체가 없었다. 내가 지금 이탈리아에 와 있다는 것을 느낄 수조차 없을 정도였는데,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 바로 ‘카페 마키아토’.




이탈리아인들의 일상에서 커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바(bar)라고 부르는 작은 카페가 골목마다 있어서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잠깐의 휴식을 즐겼다. 에스프레소가 양이 적으니, 그냥 선 자리에서 추릅, 추르릅 두세 모금 나눠 마시고 끝내는 것이었다. 혼자서 온 사람도 그랬고 친구와 온 사람도 그렇게 마시면서 대화를 조금 나누고는 가게를 나섰다. 바에 서서 1유로 전후하는 커피를 간편하게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수백 년을 커피와 함께 해온 그들의 문화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커피를 부르는 이름은 모두 이탈리아어였다. 에스프레소, 카페라테, 카푸치노, 그리고 아메리카노까지. 이왕에 이탈리아에 왔으니 그들의 문화를 따라해보고 싶은 허세 같은 호기심이 일었다. 어차피 이탈리아를 느낄 만한 거리도 없던 차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메리카노도 써서 못 마시는데, 에스프레소는 거의 독약에 가까운 것이었다. 통역을 맡은 한국인 유학생이 그런 나에게 딱이라며, 에스프레소에 폭신한 우유 거품을 올린 카페 마키아토를 권했다. 설탕을 듬뿍 치는 것과 함께. 부드럽고 달달해서 좋았다. 커피 한 잔에 피로가 달아났고 내가 지금 이탈리아에 있다는 걸 실감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커피라는 악마의 유혹에 빠져들게 됐다.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카페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각 도시의 이름난 카페를 섭렵하고 다니는 것을 여행의 작은 주제로 삼는다.

나폴리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했다는 카페 ‘감브리누스’에 갔다. 교황이 마셨던 에스프레소 잔을 씻지도 않고 얼룩진 상태 그대로 진열하고 있었다. 과연 여기서 커피를 마실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었다. 프라하에선 프란츠 카프카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던 카페 ‘슬라비아’에 갔었다. 압도적인 명성에 현혹되지 않는 저렴한 가격과 기품 있는 분위기 때문에 매일같이 들르게 되는 곳이었다. 파리에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르 프로코프’에 갔다. 하지만 너무 많이 리모델링돼 현대적 카페와 다름없는 모습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베니스에선 또 하나의 가장 오래된 카페 ‘플로리안’에 들렀다. 거기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 때문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베니스에는 ‘아모’라는 인상적인 카페가 있다. 5층짜리 백화점 건물의 텅 비어 있는 중앙에 위치한 카페였다. 그렇게 중요한 공간에 매장이 아니라 카페가 있다니, 그 나라에서 카페가 갖는 위상이 대단해 보였고 디자인적으로도 훌륭하고 아름다운 카페였다. 유럽에는 알려진 카페도 많고, 매력적인 카페도 많다. 아직 가보지 못한 카페도 많아서 여행에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나는 이 지면의 글을 항상 카페에서 쓴다. 전국 어디든 세계 어디든 카페를 찾아 노트북을 펼치면 그 순간 작업실이 된다. 서울의 좁디좁은 내 집보다 카페가 훨씬 나은 공간이다. 창의력이란 보다 넓은 공간과 높은 천장 아래에서 샘솟기 마련이니까. 한국에서 넓고 높은 공간을 갖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다. 한국은 참 좁다. 그래서 더 넓은 세상으로 여행을 나서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이 말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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