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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드리고의 카메라 로드골칫거리 낙서? 뜨거운 예술혼!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19년 03월호



그래피티(graffiti)를 처음 본 건 뉴욕에서였다. 온 도시의 벽면, 지하철, 교각 등이 알록달록한 그래피티로 가득했다. 언뜻 지저분해 보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보고 서 있으면 열정과 정성이 가득 배 있는 탄복스러운 그림이었다. 예술적인 기지마저 가득했으니 그저 낙서라고 여기기엔 아까웠다. 그림들은 하나같이 저마다의 뜨거운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애절하게 전달된 것은 작업실이 없는 가난한 아티스트, 그림을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한 무명 아티스트들의 울분이었다. 그저 그림을 그리고 싶을 뿐인 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1970년대 뉴욕 빈민가에서 시작된 그래피티는 반항적인 청소년들과 소외계층 사이에서 유행한 낙서 놀이였고 일종의 일탈 행위였다. 그들은 빈 벽면만 보이면 스프레이 페인트로 충동적이고 장난스럽게, 때로는 과격하게 빈민가 구석구석을 그래피티로 채웠다. 일탈은 더욱 대담한 일탈을 부르기 마련이라 지하철, 버스 등의 공공재까지 서슴지 않고 낙서로 덮으며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유발했다. 그래피티는 일탈을 넘어선 범죄가 됐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요즈음 그래피티가 갖는 위상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현대 예술의 한 장르로 차츰 인정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시를 더럽히는 골칫거리 낙서가 예술로 대접받기까지는 바스키아(Basquiat)나 키스 해링(Keith Haring) 같은 불세출의 아티스트들이 기여한 바가 크다. 음지의 예술을 양지로 이끌어낸 사람들이니까.
선구자들을 논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뱅크시(Banksy)’다. 영국인으로 알려진 그는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래피티계의 슈퍼스타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얼굴을 공개한 적이 없어 얼굴 없는 예술가로 불린다. 뱅크시는 런던 곳곳에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는 그래피티를 그리며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메시지와 은유가 탁월해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뱅크시의 그래피티를 직접 보진 못했다. 언젠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그의 작품을 찾아 늦은 밤까지 거리를 헤맸지만 끝내 만날 수 없었다.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는 벽화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은 이미 훼손됐거나, 다른 작가의 그래피티로 덮였거나, 건물 자체가 없어진 곳도 있었다. 벽에 그려진 그림이 이런저런 이유로 지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요즘은 세계의 어디를 가도 흔하게 그래피티를 만날 수 있다. 한국에도 일명 ‘압구정 토끼굴’과 신도림 지하철역 등의 그래피티 명소가 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그래피티는 여행자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이 돼준다. 때로는 세상의 여느 관광명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내가 직접 볼 수 있었던 최고의 그래피티는 베를린에서였다. 독일 시민들의 거주와 이동의 자유를 억압하던 베를린 장벽은 1989년 붕괴됐다. 동독 정부가 자유로운 여행을 보장하겠다고 발표하던 날,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서독 시민들도 달려와 동독 시민들을 부둥켜안고 같이 눈물 흘리며 축하했다. 동·서독 시민들은 하나가 돼 직접 망치를 들어 장벽을 부쉈다. 억압된 자유가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풍경이었다. 장벽 해체 작업이 어느 정도 이뤄지자 시민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억압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장벽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 그리고 장벽의 붕괴 소식을 들은 세계의 아티스트들이 독일의 평화를 축하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속속 몰려들어 무너져가는 장벽에 벽화를 그렸다. 한쪽에서는 장벽을 허물고 있는데 말이다. 곧 지워질 그림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벽화를 그렸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것이 그래피티의 본질이었다.



그때 그려진 그래피티가 지금도 베를린 곳곳에 드문드문 남아 있다. 그중에서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라 불리는 곳에는 압도적으로 유명한 그래피티 작품이 있다.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Dmitry Vrubel)이 그린 ‘형제의 키스’다. 남자 정치인 둘이 키스하는 그림인데,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이처럼 잘 상징하는 그래피티가 없을 것이다. 대형 벽화 앞에 서자 1989년 독일 통일의 가슴 벅찬 감동의 기운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러시아에서 독일까지 날아와 통일을 축하해준 화가도 고마웠지만 무엇보다 지금껏 잘 보존돼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 그림은 그래피티를 넘어 이미 베를린의 소중한 유산이 돼 있었다. 겨울의 궂은 날씨에도 그 앞으로 몰려든 인파가 그것을 증명해줬다.
허락받지 않고 공공재나 사유재산에 그래피티를 그리는 것은 지금도 범죄이기는 마찬가지지만, 오늘날 그래피티는 일탈과 예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래피티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혐오에서 존중으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수년 전 G20 정상회의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 넣은 사람이 긴급 체포된 일이 있었다. 경찰은 구속영장까지 신청했지만 다행히 법원은 영장을 기각했다. 그는 결국 수백만 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당시 경찰의 수사가 무리했다는 비판이 많았고, 경범죄를 적용시켜도 될 것을 검찰이 기소한 것은 억지이자 과잉대응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그가 그려넣은 쥐 그림이 바로 앞서 얘기한 그래피티의 대가 뱅크시의 쥐 그림을 오마주한 것이었다. 한국에는 그래피티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놀랍게도 서울 경찰청에서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가를 초청해 경찰청 로비에서 그래피티 제작 행사를 벌이는 데 이르렀다. 그리고 행사가 끝난 경찰청 로비에는 그래피티 작품이 아직도 전시 중이라고 한다. 격세지감이 드는 소식이었다.
생태계 건강은 돌연변이가 지킨다고 한다. 불법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래피티 작가들이 우리 사회의 건강을 지키는 건지도 모른다. 변종, 다양성, 유연함은 건강한 사회의 표식과도 같으니까. 불법이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합법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동독 사람이 서독을 여행하는 게 불법이던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그래피티가 전면적으로 합법이 될 일은 없을 것 같으나 사회의 여러 장소에서 수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크다. 그래피티는 획일화된 도시 풍경에 색깔을 입히고 알록달록한 무늬를 만든다. 나는 그것이 보기 좋고 늘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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