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추위는 퍽 조신했다. 지난해 겨울의 무시무시한 한파와 지난해 여름의 어마어마한 폭염을 반년 새 겪고 보니, 아, 이제 지구는 진짜 종말의 길로 접어들었구나, 이 마당에 맞춤법 같은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이 자리를 빌어’를 쓰든 ‘움푹 패인 눈동자’를 쓰든 하다못해 ‘쓰든’을 ‘쓰던’이라고 쓰든 그게 뭐 대순가, 이런 거 설명하고 공부할 시간에 뭐든 진탕 사랑하다가 종말을 맞는 게 수천 배 더 낫지 않은가 하며 회의에 빠져 올겨울을 맞았건만, 그럭저럭 날 만한 추위들로 한 계절을 보내고 나니 지구 종말도 좀 미뤄진 것 같고, 맞춤법 공부도 그렇게까지 쓸데없진 않아 보인다. 좀 머쓱하지만 어쨌든 새 봄 새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하자.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봄 기분은 섣불리 내서는 안 되는 법. ‘3월은 봄’이라고 세뇌받아 온 얄팍한 이성의 꼬임과 하루빨리 칙칙한 옷을 벗어던지고픈 나약한 감성의 꼬임에 넘어가 일찌감치 봄옷을 꺼내 입었다간 꽃샘추위의 호된 질책에 된통 당하고 말 테니까. 계절은 칼로 무 썰듯 딱 잘라지는 것도 아니요, 특히 봄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3월은 각별히 주의가 필요한 달이다. 그리고 ‘듯’은 띄어쓰기에 각별히 주의가 필요한 녀석이다.
맞춤법에 신경 좀 쓰신다 하는 분들은 한 번쯤 멈칫거려 본다는, 하지만 대부분 깊이 따져보지 않고 ‘에이, 이게 맞겠지~’ 하고 넘어가고 만다는 그 전설의 ‘듯’에 대해 이번 기회에 확실히 익혀두자. 간단히 말하자면 “칼로 무 썰듯”처럼 비유의 의미일 때는 붙여 쓰고(‘썰다’를 활용하는 어미), “봄인 듯 아닌 듯”처럼 짐작이나 추측의 의미일 때는 띄어 쓴다(의존명사). 예문으로 익혀보자.
· 이번엔 지난 경우와 다를 듯하다. · 생김새가 다르듯 생각도 다르다.
· 밤사이에 눈이 다 녹은 듯싶다. · 미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 조금 이따가 먹을 듯한데? · 지각을 밥 먹듯 하는구만!
· 너 참 바보인 듯. · 네가 바보이듯 나는 멍청이지ㅠㅠ
이렇게 보면 앞쪽 문장들은 ‘~한 것 같다’의 의미(짐작/추측)인 것이, 뒤쪽 문장들은 ‘~인 것처럼’의 의미(비유)인 것이 눈에 확 들어
올 듯? 마치 퇴근길 데이트를 하기로 한 아내가 저 멀리서부터 확 눈에 들어오듯! 짐작이나 추측을 할 때는 ‘여백’을 둬야 도망갈 구석이 있다고 기억해두자. 〈타짜〉에서 누가 말한 듯한데, 아, 고니가 말했듯이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아야 한다.
단, 이 구분에도 복병이 숨어 있다는 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뛸 듯이 기쁘다”처럼 딱히 짐작이나 추측의 의미는 아닌 듯한데, 오히려 비유에 가까운 듯한데 띄어 쓰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까지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니 다음을 기약하며, 큰 틀에서는 ‘짐작/추측 vs. 비유’로 기억해두면 틀릴 일이 없을 것이다. 아, 아니, 없을 듯하다.
종말 시점과는 상관없이 진탕 사랑하는 건 언제나 권장할 만한 일. 그 대상이 사람이든 취미든 추상적인 대상이든 말이다. 동일인과 6개월째 썸만 타고 있는 친구 녀석이 문득 떠오른다. 남의 연애사에 이러쿵저러쿵할 바야 아니지만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너”가 설레는 것도 한철이지, “봄이 오듯 내게 와줘”라고 말하고 들을 때의 행복만 할까. 자, 그럼 모두 행복한 봄을 맞이하시길! 나는 아내랑 퇴근길 데이트나 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