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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염승선의 브랜드텔링이글루 닮은꼴 보온병
염승선 「애플은 왜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텔링에 집중했을까?」 저자 2019년 03월호




“액화된 기체 상태를 유지해야 수소의 냉매로 사용될 수 있을 텐데….”
1892년 런던 왕립연구소 물리학자 제임스 듀어(James Dewar)는 가장 원시적인 기체 수소를 액화시키는 연구를 진행하다 문제에 부딪혔다. 여러 기체를 순서대로 액화시켜 냉매로 만드는 단계를 거쳐야 수소를 액화시킬 수 있는데, 런던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일련의 과정을 망쳐놨기 때문이다. 액화된 기체의 상태를 유지시킬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그런 그가 문득 떠올린 것이 이글루(igloo)였을까? 이후에 듀어가 만든 장치는 이글루와 닮아 있었다. 이글루는 외부의 한기를 차단하고 사람의 온기가 내부의 온도를 높여 매서운 한파에도 이누이트의 훌륭한 집이 된다.
듀어는 크기가 다른 두 개의 플라스크를 안쪽과 바깥쪽으로 겹쳐 배치하고 두 플라스크의 병목을 붙인 후 병과 병 사이 공간을 진공 상태로 만들어 용기의 외부 온도와 내부 온도를 완벽하게 차단하도록 만들었다. 안쪽 플라스크에는 은칠을 해서 내부 온도가 복사열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해 완벽하게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듀어 플라스크(Dewar Flask)의 탄생이다. 이 문제는 듀어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러 실험실에서 듀어의 플라스크를 찾기 시작했고 더 많은 플라스크를 만들어야만 했다. 문제를 해결하니 가치 있는 새로운 물건 하나가 탄생한 것이다.
가치(value)는 고대 라틴어에서 ‘건강하다’란 의미의 ‘valere’에서 파생됐다고 전해진다. 가격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음과 연관된 어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치는 필요로 하는 사람 옆에서 강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할수록 오랫동안 유지된다. 듀어의 발명은 강한 힘을 가진 씨앗이요, 시작이었다.


가치의 성장
듀어 플라스크는 듀어의 본래 연구를 방해할 정도로 많은 실험실에서 요청이 쇄도했다. 어쩔 수 없이 듀어는 독일인 기술자 라인홀트 부르거(Reinhold Burger)에게 제조를 맡기고 자신의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의뢰를 받은 부르거는 듀어 플라스크의 제조를 거듭할수록 이 기술에 탐이 났다. 실험실에서만 쓰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내용물의 따뜻한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용기라면 찾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 생각한 순간 부르거는 머릿속의 그림을 종이에 그려나갔다. 1904년 부르거는 듀어의 기술을 씨앗 삼아 그린 새로운 설계도를 특허청에 내고 생산하기에 이른다.
그리스어로 ‘열’을 뜻하는 ‘therme’를 변형해 써모스(Thermos)라는 브랜드명을 제품에 새기고 시장에 선보인 용기는 부르거의 예상대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된다. 특히 오지를 탐험하는 모험가와 등반가들이 체온을 유지해줄 도구로 애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사용해본 사람들의 경험담이 들리기 시작했다. 유리로 만들어져 무겁고 파손이 잦아 휴대용 제품임에도 휴대가 어렵다는 볼멘소리였다. 써모스는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1978년에는 세계 최초의 스테인리스 보온병을, 1988년에는 티타늄 보온병을 만들어 응답했다.
써모스는 물리학자의 손에서 탄생한 가치를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고 사용하는 이들의 의견을 제품에 반영하며 가치를 성장시켜 나갔다.


새로운 시대, 그리고 가치의 진화
휴대가 간편해지고 내구성까지 견고해지다 보니 더 많은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써모스 제품을 애용하기에 이른다. 아웃도어에서 주로 사용하는 제품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가정으로 점차 파고든 써모스의 보온병은 그것이 ‘보온병’이든 ‘보온 텀블러’든 부르는 이름의 경계도 애매해졌다.
제품의 쓰임도 ‘보온’이든 ‘보냉’이든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역할을 다할 뿐 ‘보온병=써모스’란 공식도 사라진 지 오래다. 되짚어보면 130여년 전 듀어의 아이디어는 용기 안의 액화된 기체의 마이너스 온도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으니 보냉이 더 잘돼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이제 써모스를 보온병이라 인식하지 않는다. 이 점에 착안했는지 써모스는 보온(保溫)과 보냉(保冷)의 공통점인 ‘보(保)’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담기는 것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원래의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무언가를 담을 것이기에 ‘Protect what you love(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보호하세요)’라고 슬로건을 정하고 트레이드 마크까지 획득한 상태다.
써모스는 슬로건을 통해 제품의 기능적인 부분의 가치(functional benefit) 우선이 아닌 사람들의 삶에서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emotional benefit, selfish benefit)를 중심에 두고 제품을 만드는 브랜드로 진화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는 사람에게 써모스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애용품으로 자리 잡았다. 얼음이 녹지 않아 아메리카노의 맛이 맹맹해지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보존되기 때문에 남은 한 방울까지 맛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길 수 있다.
제임스 듀어가 문제 해결을 위해 번민하며 떠올렸을 법한 이글루의 모습이 제품 디자이너에게도 떠올랐던 것일까? 텀블러의 뚜껑은 이글루를 닮아 있었다. 써모스도 이글루도 모두 소중한 것을 지키고 있다고 제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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