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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림으로 읽는 경제사윌리엄 터너의 전함과 산업혁명의 시작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2019년 05월호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년)는 걸출한 화가를 배출하지 못한 영국이 가장 자랑하는 국민화가라고 할 수 있다. 젊고 재능 있는 화가에게 수여하는 특별예술상을 그의 이름을 따서 ‘터너상(Turner Prize)’이라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의 거장이다. 그의 많은 풍경화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황혼 무렵의 바다를 그린 작품이 있다. 거대한 범선을 이끌고 가는 작고 검은 증기선을 그린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다. 1839년에 그린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해체를 위해서 최후의 정박지로 이끌려가는 전함 테메레르’다. 이 전함은 1805년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격파할 때 대단한 위용을 보여줬지만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예인하는 증기선은 돛을 단 범선을 대체하며 새로운 기술과 산업의 시대를 여는 상징물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그림은 007시리즈에도 등장한다. 시리즈의 23번째 작품인 〈007 스카이폴〉 첫 부분에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가 나온다. 이때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가 유독 한 그림을 앉아서 응시하는데, 그 그림이 바로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다. 잠시 후 그와 접선을 위해 MI6에서 나온 젊은 정보원 Q와 만난다. 두 사람은 터너의 그림을 바라보며 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Q는 한때 대단했던 전함도 쓸쓸히 퇴역하는 걸 보니 시간은 피해갈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제 한물간 본드를 겨냥한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범선을 인양하는 작지만 힘 있는 증기선에 비유하고 있는 셈이다. 본드는 이에 “빌어먹을 큰 배(A bloody big ship)”라며 어쩔 수 없이 그 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터너는 일찍이 왕립미술원에서 수학해 풍경화를 주로 그렸으며, 빛의 묘사에 집중해 자연의 모습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화가다. 그는 당시 문예비평가였던 존 러스킨(John Ruskin)이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2014년작 영화 〈미스터 터너〉를 보면 러스킨은 터너의 그림을 평가하면서 “당신의 그림 같은 명작을 볼 때면 순간을 포착하는 명료한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라고 찬사를 늘어놓는다. 이 그림이 터너가 실제로 증기선이 범선을 예인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미스터 터너〉에서는 터너와 몇 사람이 보트를 타고 가면서 붉은 일몰 속에서 증기선이 테메레르 전함을 이끌고 가는 모습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낭만주의 화가였던 그는 붉은 저녁놀 속의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범선을 보면서 저물어가는 구시대를 떠올리며, 한편으로는 검은 증기선을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징으로 그려 넣은 것이다.
새로운 시대란 혁신적인 기계의 발명으로 생산방식이 획기적으로 바뀌는 시대이며, 또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을 상징한다. 사실 산업혁명이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엽까지 약 60여년에 걸쳐 영국에서 시작된 생산기술의 발전과 이로 인한 경제·사회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런 기술적인 변화가 사회구조마저 새로운 경제사회로 급격히 이행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용어를 붙이게 됐다.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사용했는데, 이후 영국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가 1884년 출간한 「18세기 영국에서의 산업혁명 강의(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18th Century in England)」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면서 널리 퍼지게 됐다.
영국은 다른 유럽국가보다 일찍이 봉건제가 해체돼 자유농민층이 형성돼 있었다. 이들은 주로 농촌에서 가내 직물공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근대적인 생산기술을 접목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셈이었다. 당시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발명한 증기기관은 생산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꿔놨고, 이 증기기관을 개량해 만든 방적기는 면직물 생산공정을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면직물 공업은 산업혁명의 단초가 됐고 실제로 영국을 산업사회로 진입하게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처럼 산업혁명은 생산공정뿐만 아니라 경제구조의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또 정치적인 면에서도 왕정의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신흥 부르주아 세력이 자본을 축적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넓히게 됐다. 이런 정치·경제적인 변혁을 계기로 영국은 점차 자유주의 경제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또한 농업 부문이 해체되면서 많은 농민의 도시 이주, 이농(離農) 현상이 괄목할 만한 사회현상이 됐고 도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집단 거주지역이 확대되고 빈부 격차도 심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공업화를 겪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터너의 그림 중에는 새로운 기술혁명의 상징물인 증기기차를 타보고 나서 엄청난 기차의 속도에 놀란 감흥을 화폭으로 옮긴 작품도 있는데, 바로 1844년에 그린 ‘비, 증기, 속도(Rain, Steam and Speed)’다. 또한 ‘눈폭풍: 항구 앞바다의 증기선(Snow Storm: Steam-Boat off a Harbour’s Mouth)’ 같은 그림은 심한 눈폭풍에 난파 직전처럼 보이는 배의 모습을 다이내믹한 붓터치로 보여주는 1842년 작품이다.
영화 〈미스터 터너〉에서도 보여주듯이 터너는 말년에 도시를 떠나 해안에서 가까운 첼시의 외딴집에서 고독한 은거생활을 했다. 그는 조수나 제자도 없이 집주인 여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칩거했고 결국 그곳에서 고독사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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