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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드리고의 카메라 로드여행자의 방, 그리고 그 도시를 잠시나마 가져본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19년 05월호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설치는 사람이 많다는데, 나는 잠자리가 바뀌는 일이 빈번하지만 잘만 잔다. 촬영 일이 워낙 출장이 잦다 보니 호텔이나 모텔에서 지내는 날이 많고, 촬영을 안 할 때는 여지없이 어딘가로 여행을 간다. 오랫동안 촬영과 여행을 반복하며 살았으니 객지에서 자는 일 또한 자연스럽게 몸에 뱄다. 여행과 출장을 합쳐 1년의 절반 이상을 객지에서 보내기도 하는 나에게 숙소는 그저 잠깐 머무르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 숙소들이 모여 집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 돼버리니까.
꼭 나의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여행지의 숙소란, 그 여행의 품격을 좌우하기도 하는 중요한 요소다. 어지간히 작정하고 여행지를 활보하지 않는다면 전체 여행의 시간 중 절반을 숙소에서 보내게 된다. 놀라운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장기 여행의 경우에는 여행지에서도 여행을 쉬는 날을 필요로 한다.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침대에서 뒹굴며 휴식을 취하는 그런 날 말이다. 여행이 곧 삶이고 생활인 장기 여행에서 쉬는 날이 없으면 지쳐서 여행을 이어갈 수 없다.












나의 지난번 여행은 보름 동안 유럽의 몇 개 도시를 다녀온 것이었는데, 몇 달 동안 드라마 촬영에 매진했다가 방송을 마치자마자 떠났었다. 지친 일상에서 탈출해 예약한 숙소에 도착한 나는 이틀 동안 끼니를 때우러 나간 것 외에는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서 휴식을 취한 후에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지의 방에서 보내는 시간 또한 엄연히 여행의 일부다.
여행자에게 숙소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 공간이다. 그렇다고 여행자의 방이 호사스러울 필요는 없다. 일화가 하나 있다. 10여년 전의 일인데, 나카무라 토오루라는 일본의 톱스타가 한국 영화에 출연했고, 촬영 장소는 중국의 외진 곳에 있는 소도시였다. 제작진은 현지에 먼저 가서 촬영 준비를 마치고, 일본의 대배우가 입국하는 날에 공항으로 가서 그를 맞이했다. 숙소로 이동하며 제작진은 토오루에게 사과를 했다. “토오루 씨, 이 근처에는 고급 호텔이 없습니다. 그나마 좋은 방을 구하기는 했습니다만, 쾌적하지 못한 방이어서 죄송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아내와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것조차 30분 단위로 스케줄을 정해서 한다는 일본의 톱스타는 이렇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두 다리 뻗고 누울 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여행자의 방에 필요한 것은 고급스러운 집기도 아니고 너른 공간도 아니다. 낯선 이국의 땅에서 이 공간이 나를 보호해주고 지켜준다는 안온함이 여행자의 방이 갖춰야 할 최고의 미덕이다. 그러한 감각의 요건은 개인차가 상당한 부분이긴 하지만. 토오루의 경우를 좋은 예로 들었지만 대다수의 톱스타들은 제작진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까탈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벌이가 시원찮던 시절부터 여행을 다녀서인지 여전히 저렴한 방을 선호한다. 혈기왕성하던 그 시절, 하루에 천원도 안 하는 도미토리에서 현지의 서민들과 함께 뒤섞여 지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렇게 형편이 나쁜 것도 아니면서 고급스러운 방에는 여전히 마음이 가지 않는다. 낡고 허름해도 좋다. 다만 창문이 제대로 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책상 하나가 놓여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그 방에 혼자 앉아 여행을 준비하고 정리하며, 생각하고 메모하는 일 속에서 완전한 나의 시간을 누린다. 온갖 갈등으로 가득한 현실이 유폐된 곳, 지긋지긋한 일상의 자국이 지워진 곳,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며 간섭하지도 않는 곳, 게다가 안전하며 평화롭기까지 한 나만의 공간.

그러한 공간을 누리는 데 고급스러움이 필수적이진 않다. 되레 손때가 내려앉은 낡은 가구들이 더 큰 안정감을 선사한다. 여행지에서의 숙소는 서울에서 누리기 힘든 영혼의 사치를 부릴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 여행자의 방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적인 공간에서 사생활의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에선 나만의 전용 공간을 소유하려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천만원이 훌쩍 넘는 비행기의 일등석 가격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작업실이 따로 없는 프리랜서들은 카페 공간을 잠시 빌려 작업을 하고, 어쩌다 작업이 잘 풀리지 않으면 지방의 소도시로 차를 몰아 낯선 카페를 전전하고 모텔에 하룻밤 묵으며 작업을 겨우 마치곤 한다. 데이트할 만한 사적인 공간이 없는 대부분의 연인들이 노래방, DVD방을 시간 단위로 빌리는 것이고, 대학가에는 세미나나 스터디를 위한 공간을 빌려주는 업체들이 성행한다. 집을 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직장인들 평생의 숙원이 내 집 마련 아니던가. 사적인 공간을 가진다는 게 그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시간 단위로 공간을 빌려 사생활의 자유를 누리는 일의 극단적인 확대가 여행일 것이다. 여행의 혜택이란, 안온한 여행자의 방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뿐만이 아니다. 방을 나와 대도시의 인파 속을 거닐어도 나를 알 리 없는 사람들 속에서 무한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여행이란 그 도시 전체를 빌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여행은 여행자의 방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잠시나마 그 도시를 갖는 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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