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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좌표가 바뀌면 시선이 바뀐다
유지원 타이포그래퍼 2019년 06월호



나는 글자의 모양을 다룬다. ‘눈으로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언어적인 정보 외에도 비언어적인 감정을 고려하며 소통하는 사람이다. 글자를 공간에 조합하고 배열함으로써 의미와 감정을 재생성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고, 기계로 쓰는 글자인 폰트를 만드는 일을 이론적으로 다루는 타이포그래피 연구자다. 책과 독서, 글과 그림을 모두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길을 왔다.
다만 ‘어떤 가치관을 지닌 타이포그래퍼’인가에 관해서는 독일 유학이 터닝포인트가 됐다. 지구상에서 내 위치의 좌표를 크게 변화시키면, 풍경도 물론 달라지지만 같은 풍경이라도 이전에는 예상조차 하지 못한 시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미처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관점을 전환하면서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된다.
우리는 ‘서구’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말하지만, 독일과 미국의 가치관 차이는 때로 한국과 미국의 가치관 차이보다 컸다.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시각을 다루는 이공계에 비해 서로 다른 문화와 개인의 특수성에 주목하는 인문과 사회·예술계에서는 특히 독일에서의 경험이 판연히 다른 것 같다.
미국과 독일에서는 유학생을 존중하는 배려의 방식이 다른 듯 보였다. 미국에서는 미국인과 가능한 차이 없이 대하는 것을 최선의 존중으로 여기는 듯했다. 유럽, 특히 독일과 프랑스는 달랐다. 그들은 우리와 너희는 다르다는 자각을 잊지 않았다. 유럽의 지식사회는 자기반성적이었고 자기비판적인 정서가 강했다. 독일의 고등교육은 항상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디서 왔는지’ 돌아보게 했다.
나는 독일인들의 질문 속에서 한국을 새롭게 바라봤다. 한국의 맥락을 잘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뜻밖에 아시아 전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다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등 세계 구석구석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편해서 다시 바라보게 됐다. 한국의 타이포그래퍼이니 한글을, 독일에서 유학했으니 로마자만 잘 다루면 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전 세계 다양한 문자들의 다양한 양태와 공존과 네트워크를 존중하는 가치관을 갖게 됐다.
이런 시선과 가치관은 어느 순간 어느 점 하나에서 결정적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많은 순간들, 많은 점들이 경험으로 쌓여 서로 이어졌다. 그 점들은 일렬의 선 위에 놓이지도 않았다. 공간 속에 무작위로 분포해서 면을 이뤘다. 어떤 순간과 기회가 한 ‘점’처럼 다가올 때, 그것을 나를 전환시킬 순간으로 붙잡으려면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돌이켜보면 그 ‘점’이 진정 터닝포인트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앞뒤의 시간 속에 쌓인 ‘면’들을 내가 어떻게 만들어 왔느냐가 ‘점’ 자체보다 결정적이었다. 불가에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있다. 문득 깨닫는 ‘돈오’의 순간은 ‘점수’의 일상적인 훈련이 있어야만 온다. 그래야 ‘돈오’를 맞을 수 있다. 그리고 이후 또다시 일상의 훈련이 꾸준히 쌓여야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진짜 ‘돈오’가 된다. 돈오는 점수와 함께, 점은 면과 함께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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