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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허남웅의 신나는 시네누구를 위하여 ‘영광의 종’을 울리는가?
허남웅 영화평론가 2019년 06월호




혼자 지낸 지, 마지막 연애가 언제인지 손가락을 헤아려보다가 1년, 2년, 3년, 4년… 그만두기로 한다. 그냥 오래됐다고 하자. 거기에 40대 중반을 넘었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느냐고 의아해한다. 연애를 포기했느냐는 얘기다. 포기하기는, 여전히 찾고 있다.


사랑의 종을 울려라
〈글로리아 벨〉이라는 영화가 있다. 누구를 위하여 ‘영광의 종(Gloria Bell)’을 울리는가? 그런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 일단 이름이다. 글로리아 벨(줄리안 무어), 그녀는 누구인가. 50대 여성이다. 지금 혼자 살고 있다. 과거에는 같이 사는 이들이 있었다. 아들은 결혼했고 딸은 결혼할 예정이다. 아이들의 아빠와는 오래전에 이혼했다. 그러니까, 이혼녀다.
‘이혼녀’로 표현했지만, 글로리아 벨의 현재 삶은 이.혼.녀. 세 글자로 간단히 수식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 글로리아를 연기한 줄리안 무어의 얘기를 들어보자. “혼자 사는 여성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영화가 별로 없다. 평범한 여성과 보통의 삶, 그리고 그 안에 드라마가 있다. 글로리아가 겪는 모든 일상이 우리에게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아침엔 우유 한잔, 점심엔 패스트푸드,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 사는 그런 도시인의 단순한 일상과는 다르다. 이혼 전력이 있어도, 나이가 쉰이 넘었어도 틈만 나면 새로운 사랑을 향한 페로몬 발산의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 어떻게? 보험업에 종사하는 그녀는 업무가 끝나면 좋아하는 춤을 추기 위해 매일같이 클럽을 찾는다. 글로리아 벨은 클러버다!
차를 몰고 클럽으로 향할 때면 글로리아는 1970~1980년대를 풍미했던 음악을 즐겨 듣는다. ‘사랑밖엔 난 몰라’의 표정으로 에어 서플라이의 ‘All out of love’를 따라 부른 날, 그녀는 처지가 비슷한 아놀드(존 터투로)와 눈이 맞는다. 이건 은유가 아니다. 정말로 각자 춤을 추다 눈이 맞고, 이왕에 같이 춤을 추다가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애청하는 폴 매카트니의 곡으로 그때의 감정을 표현하자면 ‘No more lonely nights’, 더는 외로운 밤은 없어!
인생의 의미라고 거창하게 수식의 포장지를 두를 생각은 없다. 글로리아에게 사랑은 살아 있다는 생의 감각이다. 사랑은 모두에게 제공되는 삶의 특권이다. 글로리아는 이혼했다고, 나이가 많다고 별 시답잖은 이유로 삶의 특권을 놓지 않는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지만, 오직 사랑만 할 수 없는 현실이 젊을 때와는 달라진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낼 뿐이다.


사랑함에 영광 있으라
〈글로리아 벨〉을 연출한 이는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이다. 세바스찬 렐리오 그는 누구인가. 그는 제2의 로맨스를 시작했지만 오직 사랑만 할 수 없는 현실을 통해 잊혔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글로리아〉(2013년)를 만든 적이 있다. 이 작품에 주목한 할리우드는 칠레 출신의 세바스찬 렐리오를 불러 연출을 제안하니, 〈글로리아 벨〉은 〈글로리아〉의 리메이크다.
〈글로리아〉에 이어 〈글로리아 벨〉에서도 세바스찬 렐리오는 자신의 어머니 모습을 반영해 글로리아 캐릭터를 완성했다. “글로리아를 사랑하고 그녀의 강인함을 존경한다. 그녀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으며 삶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기를 쉼 없이 고대한다. 이것이 내가 글로리아의 사연을 관객들과 공유하는 이유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현실을 무시하고 해피엔딩의 판타지로 직항하는 영화였다면 글로리아와 아놀드의 사랑이 결혼으로 골인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었을 터. 하지만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은 아놀드와 헤어진 글로리아가 클럽에서 혼자 추는 춤으로 극을 마무리한다. 눈물로 마스카라가 번져 판다 같은 눈을 한 기괴한 모습의 글로리아를 상상할지 모르겠다. 아니다. 글로리아 게이너의 노래를 빌리자면 ‘Never can say goodbye’,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극 중 글로리아와 같은 처지가 되면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진다. 그게 뭐냐 하면, 글로리아와 아놀드를 둘러싼 주변에 다양한 반응들이 있다고만 해두자. 이에 대한 글로리아의 반응, “행복한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어요”와 같은 방향으로 극이 진행된다는 정도까지 밝혀도 되겠다. 〈글로리아 벨〉이 말하려는 건 사방에서 불어닥친 온갖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글로리아의 초상이다. 아놀드를 떠나보내고 혼자 추는 춤에도 초라한 감정 한 줄이 글로리아의 표정에 주름살을 더하지 않는다.
오히려 웃고 있는 글로리아의 얼굴을 잡는 마지막 장면의 정서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처럼 50대도 아니고 (그보다 어린 40대!) 이혼한 경험도 없고 (그렇다고 결혼한 적도 없고!) 언제 연애했는지 몸을 동원해 꼽으려면 발가락까지 동원해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새로운 사랑을 갈구한다. 이 나이에 무슨 사랑, 과 같은 생각으로 자신을 제약하고 싶지 않다. 집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춤을 춰도 언젠가 손을 잡아줄 사람이 생길 거라 믿고 있다. 누구를 위하여 영광의 종을 울리는가? 바로 나 자신이다. 〈글로리아 벨〉은 글로리아의 사연이고, 나의 이야기이면서 결국, 우리의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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