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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드리고의 카메라 로드삶을 품은 ‘공간’이자 ‘기억’…그리하여 허물지 않고 수리하고 복원해서 오래 씁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19년 06월호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둔, 내가 사는 집 맞은편 동네가 재개발에 들어갔다. 매일 들르던 슈퍼마켓이 가장 먼저 문을 닫았고, 단골이던 세탁소도 며칠 후 문을 닫으니 맡긴 옷을 찾아가라는 안내문을 내걸었다. 집집마다 가게마다 길가에 내놓은 생활 폐기물 더미들로 동네 풍경이 아주 뒤숭숭하다. 며칠 전까지 사람이 살던 동네가 한순간에 이렇게 황폐해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몇십 년밖에 안 된 건물을 철거하지 못해 안달인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면 죄다 새 건물이다. 한국의 도시가 유럽에 비해 아름답지 못한 건 시민들의 삶과 정서가 녹아든 수십 년 된 건축물이 없어서가 아닐까? 우리는 각각의 도시가 품은 고유한 인상을 찾아볼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간다. 기존의 낡은 건축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는 재개발이 한국에 횡행하다면, 유럽은 기존의 건축물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용도를 바꾸는 리모델링을 더욱 선호하는 듯하다.
처음 밟은 유럽 땅은 런던이었다. 대부분의 유럽 도시가 그렇지만 런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대적인 마천루와 수백 년 된 건물들이 공존하는 풍경이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런던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었다. 영국의 미술계를 대표하는 테이트 재단은 1990년대 이미 세 개의 미술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넘쳐나는 소장품을 감당할 수 없어 새로운 전시 공간을 필요로 했다. 당시 마가렛 대처 정부의 미술후원 정책과 맞물려 밀레니엄을 맞아 2000년에 테이트 모던을 개관했다. 테이트 모던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미술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데, 그 성공의 핵심은 리모델링이었다. 테이트 재단의 관리자들은 미술관 부지를 선정하지 못해 고심했다고 한다. 런던은 이미 포화 상태여서 도심에는 대형 미술관이 들어설 만한 빈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외곽으로 빠지자니 애초의 설립 취지와 맞지 않았다. 그렇게 부지를 찾아 런던을 배회하던 중 우연찮게 템즈 강변의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시찰하게 됐다. 런던의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상징하던 화력발전소는 석유값 상승과 환경오염을 이유로 이미 1970년대에 가동이 중단돼 황폐하고 흉물스러운 곳이었다. 그러나 런던 한가운데에 있다는 입지조건과 거대한 규모는 미술관으로 안성맞춤이었다.
테이트 재단은 버려진 화력발전소 부지에 새 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세계적인 관심 속에 건축 설계를 공모했다. 13개의 팀이 최종 후보에 올랐는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스위스의 ‘헤르조그’와 ‘드 뫼롱’의 설계가 당선됐다.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건축가들이었기에 세계 건축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재단 측이 발표한 선정의 변은 그들의 설계안이 가장 적극적으로 기존의 화력발전소를 유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경쟁자들은 첨단 건축공법과 화려한 디자인을 뽐내기에 바빴는데 말이다. 결과적으로 화력발전소는 미술관으로 변신해 오랫동안 런던 시민의 삶과 함께한 도시의 상징이 됐다. “테이트 모던 벽돌의 검댕이에는 런던이 스며들어 있다”는 어느 비평가의 말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옛것을 사랑하고 보존하기로는 파리 사람들을 빼놓을 수 없다. 테이트 모던에 영감을 준 리모델링 미술관의 원조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다. 세느 강변에 자리한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기차역이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개최에 맞춰 초현대적인 시설로 지어진 역사였으나, 철도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때문에 열차는 점점 길어졌고 급기야 오르세역의 플랫폼 길이를 훌쩍 넘게 됐다. 오르세역은 근거리 열차만 다니는 한적한 역으로 전락했고 결국엔 폐역이 됐다. 그러나 파리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차역을 허물지 않고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했다. 당시로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결정이었으나 오르세 미술관은 인상파 화가들의 주요 작품을 등에 업고 세계인을 불러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리고 테이트 모던을 비롯해 세계 여러 도시와 미술관에 리모델링의 영감을 선사했다.

파리의 훌륭한 리모델링 사례는 오르세 미술관뿐만이 아니다. ‘루브르 박물관’도 빼놓을수 없다. 12세기 병참 요새로 지어진 루브르는 16세기에는 왕궁으로 재건축됐고 지금은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파리의 손꼽히는 랜드마크다. 용도를 바꿔가며 근 천 년을 파리와 함께한 이 역사적인 건물은 20세기 말에 다시 리모델링을 했고, 중정에는 초현대적인 공법으로 ‘유리 피라미드’를 증축했다. 루브르의 정원에 유리 피라미드를 짓겠다고 하자 파리 시민들은 엄청나게 반대했다. 이집트의 상징인 피라미드를 파리의 박물관 한가운데에 짓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건축가는 중국인이었으니. 현대적인 피라미드 건축이 기존의 박물관 건물이 지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해칠 것으로 여겨졌으나, 당시의 프랑스 정부는 공사를 강행했다. 그런데 막상 짓고 보니 유리 피라미드는 옛 건물과 너무나도 조화로웠고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 돼 역사와 전통이 현대적 감각과 공존하는 가장 훌륭한 사례로 여겨지게 됐다.
여행하며 알게 된 성공한 리모델링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어쩌면 리모델링이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짓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시 환경을 경제 논리만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화력발전소나 기차역은 시민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역사의 한 부분이니까. 일종의 문화재와 같은 도시의 자산이니까. 건축은 사람들의 삶을 품고 있는 ‘공간’이자 ‘기억’이기에 소모품처럼 여겨 함부로 짓고 허물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수리하고 복원해서 용도를 바꿔가며 오래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유럽 도시를 여행하며 오래된 건물 사이를 걷다 보면 시절을 가늠할 수 없는 기분을 종종 느끼곤 한다. 그런 도시의 풍경은 낙후된 느낌이라기보다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맥락 안에 들어 있는 거대한 예술 작품을 대하는 기분이 든다. 유럽이 그토록 오래된 건축물을 지키려는 이유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켜켜이 쌓인 도시 자체를 후대에 물려줘야 하는 자산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서울의 풍경을 둘러보면 당장 살아가기에는 충분히 편리하고 깨끗하며 적당히 아름답지만, 후대에 물려줄 생각을 하면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인다. 과연 이 도시를 물려받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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