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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감탄고탄 맞춤법여름의 한가운데서 귀가 번쩍 띄는 이야기
박태하 출판편집자, 작가 2019년 08월호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눈을 질끈 감고 식은땀을 흘리곤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이었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오르막을 꽤 오래 올라가야 했는데 밤 12시가 다 돼 인적이 없었다. 누런 빛을 띈 가로등은 그나마도 하나 걸러 하나는 망가져 있었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들은 버석거리고, 슬레이트 지붕 위를 걷는 고양이들의 발자국소리가 사각거리는 곳. 낮에도 으슥한 분위기를 띄는 그 골목길을 그 시간에 혼자 걷는 건 처음이어서 바싹 긴장이 됐다.
하지만 ‘의젓한 중학생’답게 발걸음을 뗐다. 얼마쯤 갔을까. 뒤에서 이미 지나간 집 철문이 끼이익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나오는 인기척이 없었다. 잊은 물건 때문에 다시 들어갔나 보다 했다. 몇 걸음 뒤, 역시 뒤에서 다른 집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는데, 마찬가지로 인기척이 없었다. 순간 뒤에서 한 자락 한기가 느껴졌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담임 선생님이 내일 조회 시간에 암송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은 국민교육헌장을 마음속으로 외며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그 정도로 멈춰 줬으면 좋았으련만, 신은 내 편이 아니었다. 세 번째 문, 네 번째 문이 여닫혔다. 첫 번째와 두 번째와는 달리 일말의 조심스러운 기색도 띄지 않고서. 철문 닫히는 소리가 대기를 찢었고 개들이 짖었다. 숫제 달리기 시작했는데, 귓가에서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환청인가? 아닌가? 한둘이 아니라 여럿이 내는 소리였다. “으…르…떼…으…르…”
다섯째 집의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진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뒤를 돌아봤다가 똑똑히 보고 말았다. 어깨 높이에 두둥실 떠 있는 다섯 개의 얼굴을. 눈두덩이 푹 꺼진 얼굴, 긴 머리칼이 온통 피로 눅진 얼굴, 훤히 드러난 이빨만 딱딱 부딪히고 있는 얼굴…. 하나같이 큰 사고라도 당한 듯 처참했는데, 노기 띈 얼굴로 어떤 건 위아래로, 어떤 건 좌우로 빙빙 돌고 있었다. 까무러치려는 찰나, 갑자기 고함이 울렸다. “그만해!”
나라에 잡혀가 고문을 받아 미쳐 버렸다는 소문이 도는 아저씨가 저 위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예전에 고등학교 국어 선생이었다가 그 일을 겪은 뒤 이혼하고 어머니와 살고 있다는 그. 먼발치에서나 봤지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다. 어느 틈에 머리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그는 넋을 잃고 주저앉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놈들 참 짓궂지? 종종 저런다.”
“왜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 나는 울면서 물었다.
“저들은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기는 했지만 선량한 원혼이야.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려고 하는데, 소심하다 보니 사람들이 ‘띄다’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우리가 눈에 보이나?’ 하고. 그런데 알고 보니 사람들이 ‘띠다’를 써야 할 때 ‘띄다’를 쓰는 경우가 너무 많은 거야. ‘눈에 띄다’ 같은 건 맞는 맞춤법이니까 이 원혼들도 이해하는데, 그러지 않아야 할 때도 그러니 원혼들 입장에서는 아주 환장할 일이지. 그래서 너처럼 유독 많이 잘못 쓰는 친구들한테 저러곤 해. 널 해치려는 생각은 아니었을 게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나는 이 아저씨가 진짜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다시 읽어 보렴. ‘누런 빛을 띈’, ‘으슥한 분위기를 띄는’, ‘역사적 사명을 띄고’, ‘기색도 띄지 않고’, ‘노기 띈 얼굴’에서는 모두 ‘띄다’가 아닌 ‘띠다’를 써야 한단다. 눈에 ‘뜨이거나’ 귀가 ‘뜨이는’ 때에는 ‘띄다’가 맞지만 그렇지 않은 모든 경우, 그러니까 용무, 직책, 사명, 빛깔, 감정, 기운, 성질 따위에는 모두 ‘띠다’를 쓰는 거야.”
여기서도 이 아저씨가 진짜 미쳤다고 생각해야 했는데… 그때는 겨우겨우 붙들고 있는 정신줄을 더 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네네, 꼭 지킬게요. 근데 아까 원혼들이 뭐라고 속삭였는데….”
“아, 그거? ‘띄’에서 모음 ‘ㅡ’를 떼라는 말일 거다.”
여기까지 듣고 까무러쳤던 것 같다. 미소를 띈, 아니 띤 아저씨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날 이후 맞춤법에 총기를 띠더니만 눈에 띄지도 않고 배는 고픈 편집자라는 직업까지 갖게 됐으니 이 얼마나 식은땀 흘릴 만한 일인가! 이상 믿거나 말거나 납량특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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