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이다. 매해 이 날엔 파리 샹젤리제 대로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조차 이 행진을 보고 나서 미국 독립기념일에도 군사 열병식을 하겠다고 했을 정도다. 1789년 대혁명은 시민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것을 계기로 촉발됐기 때문에 바스티유 데이라고 불린다. 그 이후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까지 소위 혁명의 시대가 이어진다. 외젠 들라크루아(Eug?ne Delacroix, 1798~1863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 Guidant le Peuple)’은 1830년 파리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을 소재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샤를 10세 절대주의 체제에 대항해 파리 시민이 혁명을 일으킨 1830년 7월 28일 당시를 사실주의 관점에서 그린 것이다. 극적인 화면구성을 통해 주제가 인상적으로 드러나며 화려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붓 터치가 일품인 작품이다. 들라크루아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최고의 화가로 꼽힌다. 낭만주의는 객관보다는 주관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요시하고 개성을 존중하는 특징을 보인다. 들라크루아는 신화, 문학,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고 인물, 풍경, 정물 등 소재도 가리지 않았다. 벽화나 장식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유화, 파스텔, 수채화는 물론 판화 제작에까지 이를 정도였다. 그는 자연 속 인간의 모습은 물론 현실을 초월한 영웅적인 인간의 모습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파리 중심가에 있는 생쉴피스(Saint-Sulpice) 성당의 입구에 걸려 있는 벽화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에서 이러한 들라크루아의 화풍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돌아가자. 그림 한가운데에는 하늘에 자욱한 포탄 연기 속에서 여인이 깃발을 들고 민중을 이끌고 있다. 옆에는 총을 든 어린 소년과 총칼로 무장한 민중이 임시로 구축한 바리케이드를 넘어서고 있다. 화면 오른쪽으로는 노트르담 성당이 보인다. 여인이 들고 있는 프랑스 깃발은 프랑스 공화국을, 총을 든 어린 소년은 프랑스의 미래를 상징한다. 국민군으로 참여했던 들라크루아는 자신을 깃발 든 여인 옆에 정장 차림에 모자를 쓰고 총을 든 시민으로 그려 넣었다. 그러나 당대의 비평가들은 이 그림에 대해서 비난을 퍼부었다. 유럽 회화에서는 전통적으로 관념을 의인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렇게 의인화한 인물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대리석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로 묘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들라크루아가 표현한 여신은 그 관례에서 벗어나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여신을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다. 비평가들은 이 여신을 ‘생선 파는 여자’나 ‘거리의 창녀’쯤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실제로 들라크루아는 세탁 일을 하던 한 젊은 여자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여신은 단지 관념적인 자유가 아니었다. 그림 속에는 현실에 실존하는 구체적인 여성상이 투영된 것이다. 1830년 7월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이 보수 왕조로부터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한 것이었다. 그것은 민중의 지지와 투쟁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다. 당시의 경제 상태는 체제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영국에서부터 불어닥친 산업화의 파도는 급속한 농업의 해체를 불러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산된 무산자 계층은 열악한 경제 상태로 내몰렸고 가난과 기아는 파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를 요구했지만 부르주아 계층의 이해관계는 달랐다. 이들은 그저 급격한 체제 변화보다는 현재의 체제 속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원했다. 이들은 오히려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인 폭동 사태가 발발할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1830년 7월 혁명은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민중 계급은 기존 체제 내에서 경제적 토대를 장악한 부르주아 계층의 이해관계를 넘어설 만한 조직적인 힘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바로 이러한 혁명적 상황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쓰인 소설이다. 18세기 프랑스 사회는 전례 없이 빈부격차가 심화된 시기였다. 참을 수 없는 가난으로 빵 한 조각을 훔친 장발장 역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탄생한 인물이다. 프랑스 역사에서 혁명의 서막을 알린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바로 당시 프랑스 사회의 빈부격차로 인한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신분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촉매가 돼 일어난 폭동의 결과였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는 더 걷잡을 수 없는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면서 경제는 파탄 나버렸다. 물가는 치솟고 민중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혁명을 주도했던 로베스피에르는 1793년 정권을 장악한 뒤 치솟는 빵값을 억제하기 위해 가격에 상한을 정하는 ‘최고가격제’를 실시했으나 역부족이었다. 2년 후 그의 실각과 함께 최고가격제는 폐지되고 물가는 다시 폭등했다. 장발장이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치다 잡힌 것은 그 이듬해인 1796년이었다. 「레미제라블」에서 묘사된 프랑스 시민의 저항과 바리케이드와 총칼로 무장한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1832년 6월 시민저항군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 6월 봉기는 2년 전 7월 혁명의 실패와 이들 결과에 대한 불만이 다시 폭발한 것으로 낮은 최저임금과 가난, 그리고 당시 콜레라의 만연으로 수만명이 사망하는 등 질병의 확산이 도화선이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