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희망을 적어내라는 과제만큼 어려운 게 없었다. 나의 적성을 정확히 파악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어서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조사해볼 수도 없었다. 주변에서 마주치는 한정된 어른들과 교과서나 책, 텔레비전에서 만나는 어른들의 세계가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전부였다. 당시 나와 친구들은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연히 ‘뻔한 어른만은 되지 말자’고 의기투합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안정적인 생활 따위에 꿈을, 재미를, 열정을 맞바꾼 채로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시들시들한 삶은 살지 말자고, 눈앞의 이득을 위해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타협을 허용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마치 우리에게 당연히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질 거라는 듯이.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조금씩 깨달아야 했다. 우리가 속으로 멸시하고 냉소했던 ‘뻔한 어른’이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바로 그 뻔한 어른이 돼 있더라, 라는 자괴감은 그나마 나은 경우였다. 뻔한 어른의 대열에 끼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그렇게 노력했는데 뻔한 어른조차 되지 못할 때, 그래서 그 뻔한 어른들에게서 도리어 멸시와 냉소를 받을 때 밀려드는 자괴감은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쓰라렸다. 그것은 영혼의 일부분이 훼손되는 느낌과도 비슷했다. 견디기 힘들어 노력을 멈추면 또 다른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이 사회에서 ‘뻔하지 않은 어른’ 혹은 ‘뻔하지 못한 어른’으로 사는 건 더더욱 힘들다는 것을. 자유와 모멸 사이에서 끝없는 시소게임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김세희 소설가의 작품집 「가만한 나날」은 ‘뻔한 어른’이 되기 싫은, 되고 싶은, 돼버린, 되지 못한, 다양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저마다의 입장에서(때론 이 입장과 저 입장 사이를 오가며) 느끼는 미묘한 감정들과 삼켜내야만 하는 절망, 그 사이로 실낱같이 삐져나온 희망의 쓸쓸한 흔적 같은 것을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낸 소설이 있다니 무척 놀라웠다. 그리고 아팠다. 때로는 ‘성숙’, ‘초연’이라는 말로 거창하게, 때로는 ‘소확행’, ‘빅픽처’, ‘탕진잼’이라는 말로 유머러스하게 포장해놨지만, 어떤 사건에 의해 내 삶의 포장이 뜯겨져나가는 순간, 질소로 가득한 과자봉지 속 초라한 과자의 양을 확인해야 하는 그런 적나라한 아픔이 이 책 곳곳에 스며 있다.
현기증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인식하지도 못했던 광경이 갑자기 빛을 비춘 듯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 - p.80
그렇게 하나뿐인 딸에 대한 기대를 점점 내려놓았다. 하지만 엄마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자신이 누릴 수 있을 줄 알았던 것들.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웠던, 교과서와 텔레비전이 말하던 이미지와 삶의 방식들을. - p.87
사회초년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통과해온 시간들을 이보다 정확하게 기록한 책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프고 힘겹더라도 이 기록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 시간들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우리는 거기에 오늘을, 내일을, 그 다음날을 비로소 제대로 더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를 복원하는 방식으로 김세희는 우리에게 ‘다음’을 건네준다. 굉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