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과생이 학교 축구동아리에서 선수로 뛰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 기록이 수작업으로 단순하게 이뤄지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 그래서 직접 코딩을 배워 관리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프로축구팀에도 이런 서비스를 만들어주면 기회가 되겠다 싶어 창업했다. 축구의 본고장인 유럽은 어떨까 싶어 독일에 무작정 가서 문을 두드렸다. 이제는 13개국의 약 450개 팀이 이 창업가의 축구분석 소프트웨어를 쓴다.
학생창업, B2B 소프트웨어 사업, 해외진출 등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성공시키기가 극히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세 가지를 불과 창업 5년 차에 다 성취한 29세의 창업가가 비프로일레븐(이하 비프로)의 강현욱 대표다. 토종 한국인으로 유럽에 진출해 이제는 다양한 국적을 지닌 60여명으로 구성된 팀을 이끌고 있다. 알토스벤처스,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등 굵직한 벤처캐피털에서 누적 130억원이 넘는 투자도 받았다. 요즘은 판로를 개척하느라 유럽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는 일 년에 두 번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는 그를 어렵게 만나서 인터뷰했다.
축구의 본고장 유럽서 입소문 난 경기분석 서비스
“비프로를 쓰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비프로는 스포츠계의 구글이 될 겁니다.” 비프로는 전 세계 13개국에서 제공되는 스포츠 영상·데이터 분석 서비스다. 원래 유럽의 축구팀은 캠코더로 경기 영상을 찍어 수작업으로 분석하거나 상황에 따라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몇 가지 구매해서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비프로는 하나만 구입하면 3~4개의 제품·서비스가 하는 일을 통합해서 해준다.
비프로는 우선 사람이 직접 가서 영상을 찍지 않아도 되게 경기장에 설치형 카메라 3대를 제공한다. 그렇게 해서 찍힌 영상을 분석해 데이터를 뽑아내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 분석 결과를 토대로 팀에서 PC프로그램이나 태블릿, 스마트폰 앱 등으로 쉽게 작전 지시를 내리고 결과를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경기 내용은 카메라가 자동으로 기록한다. 모든 선수의 슈팅, 실점, 패스, 태클 등을 정확하게 빠짐없이 기록해준다. 경기별로 각 선수가 어디서 많은 움직임을 보였는지에 대한 정보도 선수 히트맵(heatmap)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지시를 내릴 때 에디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영상 위에 화살표, 빗금 등 그래픽을 자유롭게 그려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축구팀 입장에서 한번 쓰면 계속 쓰지 않을 수 없는 솔루션이다.
하지만 90분이나 되는 경기시간 동안 동영상을 정확히 분석해 경기기록을 남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다. 경기 시작 때 선수의 등번호를 AI에 기억시키면 경기 내내 그 선수를 따라다니면서 플레이를 기록한다. 하지만 AI가 모든 것을 자동화해서 정확하게 기록할 수는 없다. 여기서 약 100명의 프리랜서 분석가들이 투입된다. 전국 곳곳에서 재택근무하는 분석가들은 할당받은 경기에 대해 AI가 분석한 것을 확인하고 실수를 잡아내 정확도를 높인다. AI와 사람이 협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기 종료 후 24시간 안에 정확한 경기 데이터를 제공한다.
축구팀에 유용한 제품을 만드니 유럽에서 입소문이 났다. 이제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스페인 라리가, 독일 분데스리가 등에서 쓰고 있고 태국, 일본, 한국 등의 축구팀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이런 멋진 글로벌 축구분석 서비스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2014년 당시만 해도 강 대표는 로스쿨을 지망하는 평범한 문과생이었다. 그런데 다른 것을 배워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 코딩동아리에 들어가 코딩을 배우기 시작했고, 마침 동아리에서 가장 뛰어난 선생님을 만나 코딩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그 선생님은 나중에 삼고초려 끝에 비프로에 영입했다).
그러면서 축구동아리 리그에서 경기 결과를 수작업으로 입력하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 “제가 직접 골을 넣은 멋진 순간도 그냥 골 하나로 밋밋하게 기록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더 멋지게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래서 직접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서울대 축구동아리를 설득해 자신이 만든 웹사이트를 이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경기 동영상까지 담는 서비스를 시작하니 다른 학교 축구리그까지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예 자퇴하고 2015년 비프로일레븐을 창업했다. 생각보다 이런 영상분석 서비스를 활용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제품 개발에 나서 국내팀을 상대로 고객을 늘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16년 말 독일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 축구팀도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동영상분석 프로그램을 쓰고 있지 않았다. “인턴을 시켜서 경기 동영상을 찍고 일일이 수작업으로 분석하고 있더라고요. 독일에서 안 하고 있으면 무조건 우리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프로 직원 10명이 무작정 독일로 이주해 도전했다.
막상 가보니 기존 경쟁사들이 많았다. 1천억원 이상 투자를 받은 미국의 허들(Hudl)을 비롯해 독일의 IT 공룡 SAP 등도 경쟁사다. 하지만 강 대표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여긴다. 경쟁사들은 비프로만큼 고객을 이해하고 빠르게 제품을 개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강 대표는 독일의 9부 리그 팀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뛰고 있다. “취미삼아 뛰기 시작했는데 감독까지 하라는 제안을 받아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비프로의 고객이 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제품 개선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축적된 데이터로 ‘제2의 메시’ 발굴한다
강 대표는 비프로를 단순한 경기분석 서비스를 넘어 글로벌한 스포츠 동영상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비전을 갖고 있다. 우선 비프로를 세계 최고의 선수 스카우트 플랫폼으로 만들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유명 팀의 유명 선수 외에는 경기 동영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비프로는 유소년·아마추어 팀까지 많은 경기 데이터를 쌓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브라질 국적의 24세 이하 미드필더로 패스 능력이 있는 선수’라고 검색하면 바로 찾아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제2의 메시를 제일 빨리 찾을 수 있는 서비스로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또 비프로를 전 세계 스포츠 경기를 모두 생중계하는 롱테일(long tail) 스포츠 미디어로 만들고자 한다. 지금은 1, 2부 리그 외에는 중계가 안 되는데 앞으로는 모두 찾아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자신의 경기모습을 찍어서 분석하고 보존할 수 있는 스포츠 동영상 플랫폼을 구축하려고 한다. 스포츠 동영상의 민주화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다.
강 대표는 “유럽시장에 나가서 스포츠로 어울리다 보니 사람은 다 똑같다는 것을 느꼈다”며 “그들이 원하는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 도전하면 한국 스타트업에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요즘은 글로벌시장에서 스포츠테크(sports tech)가 뜨고 있다. 스포츠시장에도 AI와 데이터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이 시장에서 앞으로 비프로가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