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에 관한 진실. 사건 위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고 인물의 의식에 함몰해 사유하고 철학하느라 형이상적이고 사변적이어서 전개가 느리고 지루하다는 게 프랑스 영화를 향한 국내 관객의 인상이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 프랑스 영화에 관한 국내 영화 팬의 인상 아닌 진실을 수정한다.
애와 증의 존재?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뇌브)는 프랑스 영화계의 존경받는 어르신 배우다. 이번에 회고록을 찍었는데 파비안느의 말에 따르면,
1쇄 발행이 무려 10만부다. 아니다, 실은 5만부다. 이 소식을 접한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는 축하 인사 대신 “부풀리기는”이라며 엄마 파비안느의 허세를 꼬집는다. 뭐야, 이 엄마, 존경받는 배우라며?
파비안느는 고약한 구석이 있다. 나비처럼 우아한 자세로 상대방에게 다가가 벌처럼 따끔한 독설을 날리는 데 선수다. 뤼미르의 남편이자 할리우드 배우 행크(에단 호크)의 연기에 관해 ‘흉내 내는 수준’이라 깎아내리고 한 번도 딸에게 다정한 적이 없으면서 회고록에는 딸과 함께해서 행복했다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아악! 엄마가 너무해!! 뉴욕에서 엄마 찾아 삼만리 파리까지 날아왔는데 며칠 동안 엄마와 지낼 걸 생각하니 뤼미르에게 이 집은 감옥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엄마가 사는 집 뒤에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교도소가 자리하고 있다. 안락한 집과 불편한 교도소 사이에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를 생각하는 뤼미르의 신세.
그게 꼭 뤼미르의 경우에만 그럴까.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가족 구성원 각자는 모두가 가족이 애증(愛憎)의 존재다. 파비안느는 엄마인 자신보다 이제는 죽고 없는 여동생 사라를 엄마처럼 따랐던 딸 뤼미르에게 섭섭한 감정이 있다. 그래서 모녀는 평상시에는 애와 증의 중간지대에서 휴전 상태를 유지하다가 뭐라도 꼬투리가 생기면 서로에게 폭발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럴 때면 ‘웬수’가 따로 없는데, 그 때문에 상처 입은 마음에 위로가 될 사람이 절실할 때 언제 그랬냐는 듯 옆에 와 사과의 말을 전하고 따뜻하게 포옹하는 존재가 또 가족이다. 파비안느와 뤼미르의 관계를 보는 파비안느의 손녀이자 뤼미르의 딸인 샤를로트(클레망틴 그르니에)에게 마음속 집과 교도소를 오가는 할머니와 엄마는 마법과도 같은 존재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 나이의 샤를로트에게 가족의 양면성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가치인 까닭이다.
진실과 허구의 연기?
배우에게 경험은 연기의 자산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이어 연기란 무엇인가. 배우에게 경험이란 출연 작품의 편수일 수도, 그동안 살아온 삶의 경험일 수도, 그 둘 다일 수도 있다. 프랑스 영화계에서 최고로 평가하는, 할리우드로 치면 아카데미 영화상에 해당하는 세자르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받은 베테랑 파비안느에게는 모든 게 연기의 자산이다.
파비안느가 배우라는 설정이니 당연히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는 또 하나의 영화가 등장한다. 극 중 파비안느가 출연하는 ‘내 어머니의 추억’이란 작품이다. 실제로 있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국내에는 「종이 동물원」의 작가로 알려진 켄 리우의 소설이다. 엄마가 우주에 머물며 신체적인 나이를 먹지 않는 동안 지구의 딸은 나이를 먹는다. 어느 순간, 엄마보다 딸이 더 늙어 보이는데 파비안느는 78세의 딸 역을 맡았다.
파비안느를 연기한 까뜨린느 드뇌브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943년생인 까뜨린느 드뇌브에게는 연기를 하는 한 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다. ‘있다’의 현재형이 아닌 ‘있었다’의 과거형이다. 언니 프랑소와 돌리악은 동생과 함께 〈로슈포르의 숙녀들〉(1967)에도 함께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드뇌브는 물리적·신체적 나이를 모두 먹은 반면 언니는 사망 당시의 25세의 나이로 지금껏 박제된 셈이다.
지금 이게 누가 더 나이가 많은지, 한국에서처럼 2월생이니까 연도가 같아도 내가 언니네, 말도 안 되네를 프랑스식으로 따져 묻는 플레이인가. 아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프랑스 영화니까, 나이로 서열을 가리고 이러지 않는다. 까뜨린느 드뇌브의 실제 사연이 파비안느에 반영돼 있으니까, 그렇다면 파비안느를 까뜨린느 드뇌브로 봐도 되는지를 질문하고 싶을 뿐이다.
극 중 파비안느는 한 영화의 주연 자리를 두고 여동생 사라와 경쟁한 적이 있다. 원래 사라에게 갈 역이었는데 파비안느가 감독과 부적절한 관계로 몸을 섞으면서 주연 자리를 꿰찼고 그 결과로 연기상도 받았다. 그럼 까뜨린느 드뇌브도 프랑소와 돌리악과 그랬던 자매 사이? 아니다. 까뜨린느 드뇌브가 배우로서 언니와 차별화하기 위해 금발로 염색하긴 했어도 경쟁 관계는 아니었다.
뤼미르는 사실이 아닌 내용이 담긴 파비안느의 자서전을 두고 날을 세운다. “엄마, 이 책에는 진실이라고는 없네요.” 엄마는 딸의 비아냥에 콧대를 세우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배우라서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아.” 배우란 그런 존재다. 진실을 진실이 아닌 양, 허구가 허구가 아닌 양 표현하는 게 숙명인 직업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딸을 대하는 엄마 파비안느의 모습에서 어느 게 진실이고 어느 게 진실이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한때 배우 생활을 했지만, 능력이 없어 지금은 글을 쓰는 뤼미르는 딸 샤를로트에게 할머니 파비안느를 기쁘게 해줄 말을 허구로 짜주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얻는 가족의 작은 행복. 이 때문에 잠시간 애와 증 사이에서 애로 일시 휴전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家). 이럴 때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진실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걸까. 그 와중에 유일한 진실은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 프랑스 영화라도 사변적이지도 형이상적이지도 않다는 것. 전 세계 어디에서나 가족은 내가 속한 상황이면 골치 아파도 남의 사연이면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재밌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