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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또렷하고 자유롭게 한 해를 열고 싶은 사람들에게
김혼비 「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에세이스트 2020년 01월호



책 제목을 보고, 아니 이제 막 새해를 의욕적으로 시작하려는 마당에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니, 정초부터 초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제목의 책도 있듯이, 죽음을 직면할 때 삶이 한결 또렷하게 보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제대로 고민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새해에 더없이 어울리는 책이 아닐까 싶다. ‘아침’이 하루의 시작이라면 1월은 한 해의 시작이고, 게다가 이번 새해는 무려 2010년대를 닫고 2020년대를 여는 시작이니까 더욱.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다(영화 제목으로도 나왔다). 하지만 이 두루뭉술한 명제를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죽음을 직면한 상태’란 정확히 무엇인지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경험이 책이나 글로 나와 있지만, ‘죽음의 경험’에 관해 말하는 사람은 전무하다. 세상에 필자들이 이렇게나 많지만 죽어본 필자는 없고, 고스트 라이터는 있지만 ‘고스트’ 라이터는 없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라블레는 16세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한 의사이자 작가이자 인문주의자다. (…) 라블레는 쉰아홉의 나이에 사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나는 엄청난 ‘어쩌면(perhaps)’을 탐색하러 간다.” - p.158

작가이자 10년 넘게 완화의료 병동에서 일한 간호사인 샐리 티스데일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통해 수많은 ‘어쩌면’들을 하나씩 구체화시켜간다. ‘좋은 죽음’에 대한 탐색, 타인의 좋은 죽음을 위해 간병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 투병생활 연명을 결정할 때 고려할 것들, 장례 방식, 시신 처리 과정, 가까운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 등 죽음과 죽어감에 관해 미화하려는 기색 없이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여타 ‘메멘토 모리’류의 감성적인 죽음 접근법들과 셀리 티스데일의 방식의 차이가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곳은 권말에 실린 부록이다. ‘유서 쓰기’, ‘편지 쓰기’ 같은 과제 대신 원하는 통증 관리 방식, 내 시체 처리 방식 등을 꼼꼼히 체크하는 ‘죽음 계획서’,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같은, 죽기 전에 검토하고 작성해서 주변인들에게 사본으로 제공할 서류들을 첨부했다. 잘 죽기 위한 ‘매뉴얼’처럼 느껴지는 이 책의 냉정함을 불편해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만큼 이 책이 죽음과 우리 사이를 안전하게, 하지만 기만적으로 가로막고 있던 쿠션인 ‘어쩌면’들을 가차 없이 빼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 두려운 일이지만 눈이 밝아진 자들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자유를 준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습관을 형성하고 경험을 통해 배우고 약점과 강점을 파악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가꿔나간다. (…) 무심히 지나가는 일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맞이할 죽음의 종류를 창조한다. - p.21

저 문장을 본 순간, 다이어리 첫 장에 바로 옮겨 적었다. 시간 순서를 바꿔도 봤다. ‘우리가 맞이할 죽음의 종류를 미리 창조해놓는다면, 그것이 무심히 지나가는 우리의 일상을, 습관을, 경험을 바꿀 것이다’라고. 원래 문장도, 바꾼 문장도 무척 마음에 든다. 하루하루 좋은 죽음을 향해 살고 싶다. 더욱 또렷하게 죽음을 감각하며 살고 싶다. 2020년대에 품은 꿈이자 내어보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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