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원주민의 땅에 대한 노래를 수집한 여정이 담긴 여행서 「송라인(The Songlines)」. 이 책의 작가 브루스 채트윈(Bruce Chatwin)은 기록과 더불어 창작에 도움이 된 특별한 공책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검은색 공책을 꺼냈다. 기름을 먹인 천으로 감싸고 페이지를 고정할 수 있도록 고무줄을 달아놓은 공책이었다.”
1995년, 여행 중 이 수필을 읽은 이탈리아 디자이너 마리아 세브레곤디(Maria Sebregondi)는 채트윈이 호주 대륙을 누빌 때 항상 손에서 놓지 않고 함께했던 검은색 공책에 마음이 갔다. 특히나 호주로 떠나기 전 그가 파리 앙시엔느 코메디(Ancienne Comédie) 지역에 있는 한 문구점에서 100권이나 되는 이 공책을 구매한 것에 묘한 동질감마저 느꼈다. 그도 채트윈처럼 하나의 작품을 위해 여러 권의 공책이 필요했다. 디자인을 위해 기록한 아이디어들은 작품으로 탄생하기도 하지만 작품의 또 다른 모습으로 남아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보관된다.
마리아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적지 않고 앞으로도 더욱 늘어나리라 생각했다. 그길로 여행용품을 디자인하던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 모도 앤 모도를 찾아가 한때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검은색 공책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창조하는 사람들을 위한 탄생
기름을 먹인 천으로 감싼 이 공책을 프랑스에선 ‘까르네 몰스킨(carnet moleskine)’이라 불렀다. 몰스킨은 ‘표면이 부드럽고 질긴 면직물’이란 사전적 의미가 있어 표지의 모습이 그대로 보통명사가 된 셈이다. 한때 고흐와 헤밍웨이도 사용했던 이 공책을 여러 공장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생산했지만 안타깝게도 1986년 마지막 공장이 문을 닫으며 프랑스의 모든 곳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마리아와 모도 앤 모도는 프랑스 이곳저곳을 다니며 오래전의 공방을 수소문해 이 공책을 부활시킨다.
잡을 때마다 부드러운 촉감을 선사하는 둥근 모서리의 검은색 표지, 어떠한 펜으로 써도 훌륭한 필기감을 주는 미색의 중성지, 180도 펼쳐지도록 만든 사철 제본과 사용하지 않을 때 페이지를 고정할 수 있는 고무밴드, 뒤쪽엔 메모와 사진 혹은 영수증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 그리고 표제지엔 채트윈이 그러했듯이 공책 주인의 연락처와 분실했을 때 찾아주면 보상하는 금액까지 적는 난을 만들어 1997년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다. 보통명사였던 몰스킨이 고유명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마리아와 모도 앤 모도가 몰스킨을 부활시키는 동안 주목했던 것은 ‘노마드(nomad)’였다. 이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창조하고자 하는 열망에 늘 기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록은 언젠가는 작품의 기록집이자 창작의 산물로 남겨질 것이기에 몰스킨은 ‘아직 쓰이지 않은 책(Unwritten Book)’이란 슬로건으로 소통하며 띠지에 국제표준도서번호(ISBN)가 인쇄돼 서점에서 판매됐다.
몰스킨이 세상에 나오자 곳곳에서 채트윈과 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했고 이듬해 몰스킨은 유럽 전역으로 판매를 확대한다.
브랜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브랜드가 지향하는 곳과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 이때 브랜드의 정체성과 개성은 브랜드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로 닮는다. 선행돼야 하는 것은 브랜드가 지향하는 바를 소통하고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은 말이나 글에 의해서만 이뤄지지 않고 때로는 아주 파격적이더라도 브랜드와 닮은 꼴인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몰스킨을 사랑하는 창조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공책을 대중에게 뽐내고 싶어 할 것이란 것을 브랜드는 알고 있었다. 2006년 런던을 시작으로 매년 디투어(Detour)라는 전시를 세계 각국의 유명 대도시에서 열었다. 2013년 베이징을 끝으로 막을 내린 디투어에서 몰스킨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써 내려갈 쓰이지 않은 책’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렸다.
옛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다
마리아가 예상했던 대로 노마드는 더욱 늘어났고 거기에 디지털이 더해지면서 창의적인 활동은 가속도가 붙으며 하나로 이어진 세계를 다채롭게 발전시키고 있다. 철저히 아날로그적 감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몰스킨은 디지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목한 노마드는 디지털화된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필요한 부분에 디지털을 더해나갔다. 2012년 에버노트와 컬래버레이션해 만든 ‘스마트 노트’가 그러한 사례다. 아이콘이 그려진 스티커를 붙이고 에버노트 앱의 카메라로 촬영을 하면 붙여진 스티커 항목으로 자동 분류돼 담긴다. 기술제휴를 통한 사례도 있다. 미세한 도트가 인쇄된 전용 내지를 가진 몰스킨에 스마트 펜을 이용해 기록하면 전용 앱에 손으로 기록한 그대로 디지털화돼 담긴다. 자신의 손글씨에 애정을 느끼는 이들을 위해 아날로그 감성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시킨 것이다.
하지만 몰스킨의 외형은 변함없이 둥근 모서리 모양에 고정하는 밴드를 유지하고 있다. 오래전의 정체성을 그대로 부활시킨 몰스킨은 새로운 시대를 만나 진화하고 있지만 옛것으로부터 온 핵심가치는 지키고 있다.
디투어를 통해 고객과 한시적인 만남을 가졌던 몰스킨은 2016년 7월 아날로그 공간에서 고객들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몰스킨 카페’를 이탈리아 밀라노에 열었다. 18세기 예술인과 작가들이 드나들며 창작의 산실이 된 문학 카페를 현재의 브랜드 정체성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다. 세대가 변하고 사람이 바뀌어도 몰스킨을 찾는 이가 많아지는 이유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브랜드라도 그 시대에 걸맞게 변화하고 진화하면 사람들은 그 브랜드가 살아 있다 인지한다. 그래야만 브랜드의 가치에 생명력이 생기고 브랜드를 만든 사람과 사용했던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도 사람들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어쩌면 훌륭한 브랜드는 과거에 있었던 중요한 문화를 후대에 전달하는 중차대한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