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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특별한 독서로 취향을 확장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김혼비 「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에세이스트 2020년 02월호



언젠가 친구가 새해에는 고정된 패턴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던 게 기억에 남아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서로 취향을 잘 알고 있어서 보통은 실패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건네는 순간까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희곡집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주변에 연극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졌다. 나부터도 그랬다. 그래도 연극은 보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희곡집은 읽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 꼭 희곡집의 독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연극은 보는 것이지 읽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부터도 그랬다.
그럼에도 희곡집을 선물했던 건, 몇 년 전 우연히 국내 작가가 쓴 현대희곡을 읽었다가 희곡 특유의 매력을 처음으로 느꼈고, 그 후 드문드문 희곡을 읽게 되면서 연극을(주로 현대창작극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0년 만이었다. 똑같은 책도 20대에 읽는 것과 30대에 읽는 것이 다르다고 하는 것처럼 연극도 그랬다. 영상을 보는 데만 오래 갇혀 있느라 써보지 못했던 감각들이 무대 아래에서 열리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함께 사는 T와의 희곡 낭독으로도 이어졌다. 가끔씩 술을 마시다가 희곡을 골라 배역을 나눠 연기했는데 이게 또 은근히 재미있었다.
바로 지난주, 친구가 문자로 대뜸 사진을 보냈다. 사진을 열어보자마자 웃었다. 친구 옆에 붙어 있는 연극 포스터에 제목으로 ‘여자는 울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여자는 울지 않는다 → 그럼 웃겠다’ 이런 마음으로 웃은 건 아니다). 저 제목은 내가 친구에게 선물한 희곡집 제목이었다. 그 희곡집은 친구가 마침 보러간 연극인 표제작을 포함, 요즘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극작가 네 명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성폭력, 감정노동, 원치 않은 임신과 결혼, 비혼과 노년을 주제로 쓴 네 편의 창작 희곡을 묶은 책이다.
친구는, 태어나서 처음 읽는 희곡집이라 초반엔 낯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절로 대사를 음독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가슴에서 뭔가 자꾸 치받혀 오르면서 이 여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연극으로라도 보고 싶었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이야기 속 여성들 위로 내가, 내 친구들이, 다른 여성들이 자꾸 겹쳐서, 이 모두가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인 「밤에 먹는 무화과」 속 ‘윤숙’의 파티에 초대받은 데면데면한 유령들 같아서, 각자 흩어진 채로 어딘가에서 외롭게 사그라들고 있을 것만 같아서, 누구라도 직접 만나 확인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은지. 잘 버티고 있는지. 어쩌면 그래서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자: 형사님, 제게 이유를 물어보셨죠. 왜 누군 죄를 짓고 잘 지내고, 왜 누군 죄 없이 울어야만 하냐고요. (…) 하지만 그런 질문에 어떤 대답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화가 나지 않겠어요? - p.64

이번 ‘독서의 문장’은 친구와 함께 뽑았다. ‘여자’가 던진 저 질문에 우린 어딘가 조금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와 비슷한 루트로(하지만 훨씬 빠른 속도와 열정으로) 친구가 새로운 취미를 찾아 기쁘다. 요즘 친구는 고전 희곡을 하나씩 읽으며, 나와 보기로 한 창작집단 LAS의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엔 둘이 배역을 나눠 희곡 낭독도 해봐야겠다. 이게 또 은근히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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