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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허남웅의 신나는 시네인생은 고통과 영광을 수반한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2020년 02월호


 

(※영화의 결말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페인 앤 글로리(Pain and Glory)’를 직역하면 ‘고통과 영광’이다. 고통 앞에 영광 있으라? 아니다. 영광 앞에 고통 있으라, 다. 말장난, 아니다. 반백 년 가까이 살다 보니 왜 영광 앞에 고통이 있는지 이해할 것 같다. 행복은 상처의 시간을 견디면 찾아오는 달콤한 과실(果實)의 감정이다. 장삼이사도 그럴진대 작품으로 대중의 평가를 받는 예술가라고 오죽할까. 고뇌하는 창작의 지난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영광의 순간이 찾아온다.

고통의 시간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아프다. 툭하면 찾아오는 두통 때문에, 시도 때도 없는 사레질 때문에, 등에 받은 척추 수술 때문에 아프다. 이게 다 영화감독을 하면서 얻은 스트레스 때문이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나 영화감독 안 할래! 메가폰을 잡아본 지 오래다. 그래도 잘 나갔던 과거에 걸작 평가를 받았던 영화가 있어서 초청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그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와 함께하는 행사다.
살바도르 너도 아프냐,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 나도 아프다. 알베르토는 살바도르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다. 하지만 살바도르와는 오랫동안 연을 끊었다. 알베르토의 연기가 별로였다고 비판하는 통에 자신감을 잃어 배우 생활이 엉망이 됐다. 살바도르가 초청 건으로 알베르토를 찾아와 악감정은 잊자고 화해를 청한다. 알베르토는 살바도르가 쓴 자전적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 연기할 수 있게 허락하면 받아들이겠다고 조건을 건다.
과거의 영광은 이제 안녕, 당시 얻은 명성의 단물 빨아 연명하는 살바도르와 알베르토는 예술가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예술가 다루는 영화 아니랄까봐 〈페인 앤 글로리〉는 이들의 현재 상황을 의미하는 ‘해골’ 이미지-‘건즈 앤 로지스’의 ‘Appetite for Destruction’ 앨범 커버의 해골 이미지가 들어간 셔츠, 무대극 ‘햄릿’의 왕관을 쓴 해골 포스터 등-를 곳곳에 배치했다.
이를 고상하게 라틴어로 표현하면 ‘바니타스(Vanitas)’다. 우리 말로 하면 ‘세상 참 덧없네(人生無常)’의 의미다. 바니타스는 그림에 사용될 때 정물화의 형식을 띤다. 정물화는 움직이지 않는 물체, 즉 정물을 소재로 한 그림이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해골 이미지가 즐비한 알베르토의 집과 다르게 살바도르의 집에는 정물화가 벽에 걸려 있다. 거울 이미지처럼 살바도르의 심리를 투영해 보여주는 듯하다.
살바도르,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지금은 한물간 예술가라고 해도 작품 만들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바니타스 이미지가 눈에 잘 띈다고 해도 예술적 삶을 향한 살바도르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건 화면을 지배하는 빨간색의 기운 때문이다. 살바도르가 자주 입는 빨간 옷, 알베르토가 무대에 설 때 배경으로 비추는 빨간 조명 등 갖가지 빨간색의 미장센이 예술적으로 죽어가는 살바도르의 부활을 암시한다.


영광의 시간
살바도르의 자전적 내용을 바탕으로 한 알베르토의 1인극 무대는 그림으로 치면 피터 몬드리안의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이다. 몬드리안은 선과 면으로 이뤄진 사각형의 공간에 원색을 채워 넣는 방식의 그림을 그린 추상화가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내용의 그림을 영화 속 무대 이미지로 변용한 건, 삶이란 몇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추상의 형태이고, 살바도르의 삶을 반영하면 그나마 구체적인 의미를 포착할 수 있어서다.
스크린은 선과 면으로 이뤄진 사각형의 형태다. 살바도르는 그 안에 이야기와 이미지를 담아 영화를 만들었다. 몇 편은 크게 성공해서 스크린을 넘어선 감동을 관객에게 선사해 그 감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의 무엇이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의 삶과 공명했다. 즉 선과 면의 단순함을 뛰어넘는 게 삶이라는 추상이다. 현실이 너무 아파 과거로 기억이라는 스크린의 선과 면을 거슬러 올라가니 살바도르에게는 사랑이 넘쳐나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이룬 남자와 빨갛게 사랑했던 기억이 있다. 글을 모르는 동네 조각가 형에게 쓰고 읽는 법을 알려주다가 사랑에 눈뜬 빨간 시절의 기억도 난다. 빨간 욕망이 회색빛으로 탁해지지 않게 살바도르를 향한 자식 사랑으로 평생을 희생한 엄마에 관한 기억은 더욱 특별하다. 남편을 잘못 만나 변변한 집을 갖지 못했던 엄마는 어린 살바도르가 불편해하지 않게 잠자리를 구하는 데 신경을 썼다.
〈페인 앤 글로리〉에는 어린 살바도르가 엄마와 함께 기차역의 벤치에서 잠을 자는 장면이 영화 초반과 끝에 반복해 등장한다. 그 구도의 분위기가 꼭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의 ‘피에타’를 떠올리게 한다. 다르다면, 그림이나 조각상과 다르게 살바도르와 엄마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것.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삶은 액자 속에 갇히거나 조각처럼 박제되지 않는다.
우리 삶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예술이다. 살바도르도, 알베르토도,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삶도, 그리고 이 영화를 연출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삶도 말이다. “이 영화는 제가 70년 동안 살아온 결과물입니다.” 알모도바르의 자전적 내용을 담은 〈페인 앤 글로리〉는 올해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서 〈기생충〉과 함께 강력한 수상작으로 손꼽힌다. 고통의 시간이 있었기에 영광이 있으라. 예술이 주는 삶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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