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검진에서 네 번째 갑상샘암 재발 판정을 받은 날은 한창 회사 일이 분주하던 주초의 오전이었다. 마지막으로 수술을 받은 지 3년도 채 안 됐을 때라 당황스럽고 서글펐다. 어느새 나는 평소 존경하고 따르는, 일하는 방식과 태도에 대해서 참 많이 배운, 한 상사에게 사내 메일을 쓰고 있었다. 1분도 채 안 돼서 전화가 울렸다. 지금 바로 올라오라는 전갈이었다.
“당장 관둬.” 동대문 일대가 통유리창 너머로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휴직 같은 거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오늘 짐 싸서 내일부터 나오지 마.”
말투는 앙칼진데 어쩐지 그 말을 듣고 긴장이 풀려 절로 눈물이 났다. 불과 30분 전, 몇몇 동료와 직속 상사에게 암 재발 소식을 털어놓았을 때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몇 달 휴직하고 건강 챙겨서 다시 회사 나오면 되지, 뭘 걱정이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휴직계를 내고 다시 복귀하라는 말은 분명 객관적으로는 ‘내가 이 조직에 아직 쓸모가 있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기분 좋은 말일 텐데, 당시의 나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회사를 떠나라고 윽박지르는 말에 왜 되레 안도했던 것일까? 회사를 완전히 그만두지 않는 한, 휴직상태여도 계속 회사 일에 예민하게 신경을 쓰고 어떤 형태로든 엮여서 일을 해버리고 말 내 성정을 그 상사는 다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면 건강을 챙기지 못할 것을 우려한 것.
과연, 한 달 후의 수술과 핵의학 치료, 그리고 항시적인 갑상샘 기능저하증으로 내 체력은 바닥을 쳐서 아파트 단지 한 바퀴도 혼자 못 걸을 정도였다. 제한된 체력으로 할 수 있고 일하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다 보니 글쓰기밖에 없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신문과 잡지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의 영역이었다. 그 취미가 이제는 직업이 돼야만 했다. ‘차선’을 ‘최선’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작가가 된 계기’에는 흔히 다른 작가들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는 문학소녀의 꿈도, 숱하게 시도했던 등단을 위한 습작도, 어느 날 불현듯 다가온 섬광 같은 계시도 없었다. 그저 몸이 아파 평범한 직장인으로 일하는 걸 포기한 인간이 잡았던 유일한 지푸라기였던 셈. 인생은 그토록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생각지도 못하게 운명의 장난처럼 지금 여기까지 왔고 나는 어언 스무 권의 책을 냈다. 그때 만약 내가 ‘퇴사’가 아닌 ‘휴직’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작가가 아닌 골골한 직장인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결정적 순간은 2004년의 추운 겨울날, 동대문 두산타워빌딩 33층 사무실에서 일어났다. 회사생활에서 체득한 규율과 성실함, 자발성 등의 자산을 글쓰기라는 새 일에 잘 응용해내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에서 나를 기꺼이 ‘잘라준’ 그 상사에 대한 예의라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다. 참고로 그 상사는 두산그룹과 대한상공회의소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박용만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