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장보기란? 007급 신속 민첩함을 발휘하는 긴장의 순간이자 속도와의 전쟁. 상인이 비닐봉지를 뜯는 2초 사이 다른 농산물에 눈길을 주거나 지갑을 꺼내면 끝이다. 정녕 ‘검정 봉다리’를 받게 될지니 마스크가 품절되는 속도로 장바구니를 들이밀어야 한다. 또한 고등어, 젓갈, 두부 등을 담기 위해 용기를 바리바리 챙긴다. 처음에는 용기를 챙기는 것이 귀찮았지만 장을 본 후 정리할 필요 없이 그대로 냉장고에 넣으면 돼서 오히려 편하다. 음식물이 묻은 젖은 비닐을 씻어 말릴 필요도 없고 쓰레기도 나오지 않는다.
몇 년 전 해외 ‘제로 웨이스트 숍’에서 이런 ‘노-오-력’ 없이도 쓰레기 없는 장보기가 가능한 신세계를 보고 말았다. 독일의 제로 웨이스트 숍은 700여 종류의 제품을 포장재 없이 판다. 용기나 장바구니가 없다면 숍에서 구입하거나 빌려 쓰면 된다. 각종 채소는 물론 올리브유, 식초, 꿀, 사료, 원두, 간식, 화장품, 세제 등 필요한 물품을 껍데기 없이 알맹이만 덜어서 살 수 있다. 고객은 원하는 만큼 무게를 달아 가격표를 출력한다. 1인가구도 남기지 않을 만큼의 소량씩만 구입할 수 있어서 좋다. 또한 원두나 곡물을 개인별로 도정해주는 맞춤형 서비스도 제공한다.
제로 웨이스트 숍은 독일, 프랑스, 슬로베니아 등 유럽은 물론 태국,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전 세계로 확산되는 추세다. 프랑스에는 2013년 개장한 후 현재 55개 매장을 운영하는 제로 웨이스트 숍 프랜차이즈 데이바이데이(Day by Day)가 있다. 또한 체코의 미와(Miwa)는 제로 웨이스트 매장을 위한 표준화된 용기와 매대를 보급하고 제품판매가 끝난 빈 용기를 제조업체로 바로 보내 유통과정에서도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해외의 경우 대형마트에서도 ‘플라스틱 프리(plastic free)’ 움직임이 활발하다. 영국의 대형마트인 아이슬란드(Iceland)는 플라스틱 프리 코너를 따로 운영하고 이를 전국 체인으로 확장한다. 테스코(TESCO)는 2025년까지 모든 상품 포장재의 83%를 재활용하고 포장재 무게를 절반으로 줄일 계획이다. 또한 참치캔, 비누, 콩, 토마토 등의 필수품을 플라스틱 포장 없이 판매하고 소비자가 직접 용기에 담아 구매하는 행동을 장려한다.
국내에도 제로 웨이스트 바람이 활발하다. 이미 서울 성수동 더 피커(The picker), 상도동 지구샵, 제주도 지구별가게 등이 운영되고 있다. 망원시장에서 장바구니를 대여해주는 ‘알맹’ 팀은 자기 용기에 세제를 리필할 수 있는 동네 소분숍을 선보였다. 곧 서울 가좌동과 울산에도 제로 웨이스트 매장이 문을 연다. 또한 환경부와의 협약으로 초록마을 및 올가 일부 매장은 제로 웨이스트 가게로 변신하는데, 초록마을 목동점과 올가 방이점부터 시작한다. 영등포 신세계백화점 역시 1층에 명품과 화장품 브랜드 대신 농산물을 포장 없이 판매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행 「식품위생법」상 병조림, 전분, 식초, 유가공품 등, 「위생용품 관리법」상 세척제, 「화장품법」상 맞춤화장품조제관리사를 고용하지 않는 한 화장품의 소분 판매가 금지돼 있다. 그러니 진정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면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제도 변화 역시 필요하다. 그때까지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껍데기 없이 알맹이만 사는 생활을 해볼까. 포장재만 안 써도 전체 생활 폐기물의 30%를 줄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