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얽힌 추억이라면 창고에 보관 중인 못 쓰는 물건 수만큼이나 많다. 종로의 서울극장에서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를 조조로 보겠다고 새벽 6시부터 매표소 앞에 줄을 섰던 일, 홍콩 누아르가 한창일 때 <아비정전>(1990)을 보러 중앙극장에 갔다가 액션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영화 상영 중 관객이 항의의 표시로 대거 퇴장하는 현장을 목격한 일, 중·고등학교를 신촌 쪽에서 다녀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단체로 신영극장에 가 성룡 영화를 봤던 일 등이 그렇다.
보성의 국도극장
제목이 ‘국도극장’이다. 국도극장에 얽힌 추억도 있다. 멀티플렉스가 대세인 지금은 관객이 많이 찾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관을 대부분 차지하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극장별로 트레이드마크 영화들이 있었다. 중구의 대한극장은 <벤허>(1959), <가을의 전설>(1994) 등 풍광이 뛰어난 대하 서사극을, 단성사는 <장군의 아들> 시리즈, <서편제>(1993) 등과 같은 기념비적인 한국 영화를 상영했다. 국도극장? 지금의 젊은 세대는 허관걸, 이연걸 아시려나? 각각의 대표작인 <최가박당>과 <황비홍> 시리즈가 절찬리에 상영돼 많은 관객을 모았다.
엇! 내가 말한 국도는 지금은 사라진 을지로의 극장인데 <국도극장>의 국도극장은 전남 보성에 있다. 실제로 있는 극장은 아니고 제작진이 영화를 위해 벌교에 있는 건물을 빌려 극장처럼 꾸몄다. 아무튼, 영화 속 국도극장은 굳이 꿰맞추면 서울과 완전 관계가 없는 건 아니다. 기태(이동휘)는 서울에서 법학과를 나와 고시 공부를 하다가 7수 끝에 내가 이러려고 법학 공부를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때마침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도 들어, 고향인 보성으로 내려온다.
고향 사람들이 만나면 반갑다고 인사는커녕 아직 결혼 안 하고 뭐 했어? 서울에서 대학 나와 가지고 직업도 없이 왜 이래? 내가 이러려고 고향에 내려왔나 다시 한 번 자괴감이 들고 괴롭던 차, 국도극장에 일거리가 생긴다. 사실 내가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닌데, 속으로는 극장 일이 꺼려져도 어머니 생신에 선물도 준비하지 못할 정도로 버는 돈이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처럼 뭐라도 해야 할 처지다. 간판장이 겸 관리인인 오 씨(이한위)는 잠깐 일하다 말 것 같은 기태가 탐탁지 않아도 당장에 사람이 없어 기태를 매표소 직원으로 받아들인다.
재개봉 영화만 상영하는 까닭에 관객보다 꼴랑 두 명인 직원이 더 많을 때가 허다한 이곳에서 기태는 오 씨와 동창생 영은(이상희)과 잡담 떠는 시간이 더 많다. 기태만큼이나 사연 있는 사람들이어서 오 씨는 밤낮없이 술에 취해 가족도 있으면서 극장에 아예 살림을 차렸고, 가수 지망생 영은은 아르바이트하랴, 오디션 보러 서울에 올라가랴, 참 열심히도 산다. 극장 간판의 전면에 나서는 주인공과 같은 스포트라이트의 삶만을 바라봤던 기태에게, 관심받지 못해도 묵묵히 삶을 지속하는 오 씨와 영은의 존재는 인생이란 무얼까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내 마음의 국도극장
재개봉 전문관 국도극장의 간판에 걸리는 영화들은 <흐르는 강물처럼>(1992), <첨밀밀>(1996), <박하사탕>(2000), <봄날은 간다>(2001) 등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극장에 꽤나 들락날락했던 이들이라면 기억에 남아 있을 만한 명작들이다. 이 영화들의 캐릭터에 감정이입해 얼마나 울고 미소 지었던지, 삶이 이들 작품과 같다면 살아볼 가치가 있구나!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삶은 멀티플렉스에서 매주 개봉하는 영화들처럼 정신없이 앞으로 흐르기도 하고 국도극장의 재개봉 영화들처럼 천천히 뒤를 돌아보게도 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고시 합격만 바라보며 살다 보니 주머니에는 꼬깃꼬깃 담배 살 몇 천 원만 남아 있어, 친구들은 번듯한 직장 잡아 편히 연락할 수도 없고, 그러면서 훌쩍 30대를 넘어선 기태의 ‘봄날은 갔다’. 그렇다고 ‘나 다시 돌아갈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기태에게 삶이 아름답다면 의지할 공간과 그곳에서 만난 인연이 있어서다. 특히 고향에 돌아와 우연히 만난 영은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관계는 꿀처럼 달콤하다는 뜻을 지닌 ‘첨밀밀’의 시간이다. 지금은 서울로 떠나 곁에 없지만, 찾아가면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로 맞아줄 영은이 기태는 든든하기만 하다.
삶은 영화와 같다, 는 뻔한 소리를 할 생각은 아니다. 삶은 영화와 다르다. 대신 영화가 삶을 위로하고 위무해줄 때가 있다. 그래서 기억 속에 따뜻하게 남은 영화는 시간을 초월해 우리 곁에 머문다. 멀티플렉스가 극장 문화의 전부로 받아들여지고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가 대세인 지금에 얼마 남지 않은 영화 속 국도극장과 같은 허름한 재개봉 상영관을 일부러 발품해 찾고 싶은 건 상처받은 영혼을 호~ 불어주고 빨간약 발라줄 마음의 약손이 그곳에 있어서다.
기태에게도 드디어 ‘내 인생의 영화’가 생겼다. 부와 명예와 결혼의 성공 기준을 좇느라 돈 없어, 직장 없어, 결혼 못 했어, 주인공은 무슨, 조연 축에도 끼지 못해 단역의 삶으로 몰렸던 그의 영화는 이제부터 <영웅본색>
(1986)이다. 달러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던 극 중 주윤발처럼 사회가 바라는 성공의 집착을 마음속에서 불태워버리니 안 보이던 삶이,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이가 우러르는 삶이 아니라 내가 만족하고 내 주변과 불화하지 않는 삶, 작은 세계일지라도 내가 주인공인 삶은 기태도 ‘영웅’으로 춤추게 한다. 당신 삶의 영화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