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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드리고의 여행 한 페이지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낯선 창밖 풍경을 만나기 위해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0년 06월호

 

여행지의 숙소를 고를 때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 창문이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때 창문에 대한 정보가 미진하다면 그 방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직접 방문해서 숙소를 정할 때는 주인에게 창문이 크게 난 방을 보여달라고 주문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마음에 들면 숙소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요소들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별로 따지지 않는다. 청결이나 정숙함, 조도, 냉난방 이런 것들. 그렇다고 해변에 면한 호텔의 ‘오션뷰’처럼 웃돈을 치러야 하는 절경을 좇는 것은 아니다. 정제된 풍경보다는 내가 여행하는 그곳의 정취를 들여다볼 수 있는 날것의 풍경을 바란다. 그러니 오션뷰보다는 반대편의 저렴한 ‘시티뷰’를 더 선호한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적인 동네의 풍경이라 해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나와 다른 복장을 하고, 내가 먹는 음식과 다른 요리 재료를 들고서, 내가 사는 집과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만 봐도 좋다. 세상이 엇비슷한 것 같아도 지역마다 국가마다 여전히 정서가 다르고 당대의 유행이 다르다. 그런 작은 차이를 읽어내는 맛으로 창문을 들여다본다. 나에게는 세상의 모든 창문이 한 편의 영화를 틀어놓고 있는 것만 같다.
다만 서울의 내 방에 난 창문, 종종 들러 글을 쓰는 카페의 창문 등 익숙한 공간의 창문이 상영하는 영화는 너무 자주 본 탓에 시큰둥하다. 눈길이 가지 않으니 창문이 있어도 막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창문이 막혀 있으니 나의 사유와 감각도 세상을 넘나들며 교호하지 못하고 내 안에 고여서 맴돌다 사그라든다. 반면 여행지에서는 숙소의 창밖 풍경은 물론이고 차창에 흐르는 사소한 풍경도 온통 처음 보는 것들이니 온몸에 호기심이 돌며 감각이 깨어나고 사유도 활성화된다. 창문은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인 동시에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비바람과 같은 각종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지만 여전히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 객관적이고 안전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해준다. 더욱 유연한 사고와 다양한 생각을 갖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창밖 풍경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낯선 창문을 만나기 위해.
세상과 나를 만나게 해주는 매개라는 측면에서 카메라는 창문과 닮았다. 어찌 보면 휴대용 창문을 가지고 다니는 셈일지도 모른다. 뷰파인더라는 창문을 통해 바라본 세상을 기록한 것이 사진이니까. 낯선 창밖 풍경을 통해 깨어난 감각과 감정들, 활성화된 생각들, 나를 에워싼 여행의 정취들. 혼자 간직하기엔 과분한 순간들이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세파에 흔들리며 삶의 용기를 잃어갈 게 뻔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둔다. 과거에 경험한 일을 머릿속에서 한 장의 사진으로 떠올려 경험 전체를 기억하는 것을 ‘포토그래픽 메모리(photographic memory)’라 한다. 한 장의 사진에는 찰나의 순간뿐만 아니라 전후의 시간이 함께 담기기도 하는 것이다. 마음을 한데 모으고 조용히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진 속의 이미지들이 움직이는 것만 같다. 마치 실제로 창문을 내다보고 있는 것처럼.

 

여행을 기록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사진사인 나는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매달 짧은 연재 글을 쓸 때마다 쩔쩔맨다. 단어 몇 개 겨우 끄적거렸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곤 한다. 반면 사진은 글보다 수고가 적지만 보다 직관적이며 더욱더 생생하게 전달된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하지 않던가.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뇌의 일부가 외부로 돌출하면서 눈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눈은 그만큼 뇌와 가까이 연결돼 있는 감각기관이다. 인간의 사유체계가 눈에 많이 의존한다고 하니, 그만큼 ‘본다’는 것은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탁월한 방법이다.
세계는 지금 하나같이 창문을 걸어 잠그고 여행자의 눈을 가려놓았다.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정도의 완화는 있을지 몰라도 창문이 활짝 열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요즘의 나는 어쩔 수 없이 지난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여행을 추억하고 지낸다. 새롭고 낯선 창밖 풍경을 보지 못하는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늘 보는 서울의 창밖 풍경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사진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나는 여행의 순간들을 반추하다 보면 새삼스럽게 사진의 위력을 다시 느끼게 된다. 나의 여행사진 속에서 시간을 품은 채 살아 있는 친구들은 무사히 잘 지내고 있을까? 당장은 여행을 떠나지 못하지만 코로나19 이후를 차분히 대비하는 심정으로 카메라와 렌즈를 죄다 꺼내 깨끗하게 닦아놓았다. 앞으로 여행하고 싶은 곳들의 버킷리스트를 보완하고 정리해놓기도 했고. 내가 아직 열어보지 못한 창밖 풍경 속에 있을 세상 모든 사람의 안녕을 기원하며, 목마른 여행자는 코로나19가 종식되기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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