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본에서 한국의 대척점에 놓여 있는 나라 칠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와인, 축구, 이스터 섬과 같은 막연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나라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우리나라 일간지의 주요 지면과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가 칠레라는 키워드로 채워지는 흔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전 세계 주요 언론도 칠레를 주목했다. 바로 칠레 정부의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 조치로 칠레 전역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티아고 주요 시가지는 최루탄 냄새로 가득했고 지하철과 각종 상점은 방화자국으로 검게 그을렸으며 다음 날이면 부상자·사망자에 대한 기사가 신문 1면을 차지하는 일이 나날이 반복됐다. 대통령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급기야 APEC 정상회의 의장국이 행사를 한 달여 앞두고 회의 개최를 포기하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례를 남기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태는 칠레가 정치·경제적으로 중남미에서 가장 안정된 나라라는 세간의 통념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명색이 OECD 회원국인 칠레가 단돈 50원 때문에 나라 전체가 흔들리고 국제행사까지 포기하는 상황에 이른 것인가 의아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언론에서 ‘단돈 50원’이라고 언급했던 지하철 요금 인상은 한화로 40만 원을 최저임금으로 받아 중남미에서 가장 높은 물가를 버텨야 하는 칠레 시민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도화선이었다. 그리고 이 시위는 칠레가 오늘날 OECD 국가 중 지니계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되기까지 시민들이 지난 40년간 묵혀온 뿌리 깊은 앙금의 분출이었다.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불붙은 반정부 시위, 근본 원인은 신자유주의 기반의 헌법
시위 기간 동안 칠레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사회개혁 어젠다’라는 이름으로 최저임금 인상, 연금대상 확대, 건강보험제 개선, 소득세 인하 등 다양한 대책을 발표했지만 시위는 잦아들지 않았다. 시위대는 경제적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이 일개 정책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에 대해 신자유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 헌법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현행 헌법은 군부 쿠데타를 통해 17년 장기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1973~1990년) 시절에 제정된 것으로 교육·의료·복지 등 국민의 기본권과 밀접한 부분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피노체트 정권이 피로 얻은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를 물가안정과 경제발전에서 찾고자 했던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피노체트 집권 당시 칠레는 인플레이션율이 400%에 이르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민영화를 통해 공공지출을 대거 축소해야 했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기반의 헌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군부정권 동안 259개의 칠레 국영기업은 14개 기업과 1개 은행을 제외하고 모두 민영화됐다. 연금·의료·교육·통신·전기와 같은 기초적인 공공서비스까지도 모두 민영화된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한 결과 피노체트 집권기에 칠레는 연평균 6% 성장률을 기록하는 경제 호황을 누리게 되는데, 당시 중남미 평균 성장률이 2%대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다. 가시적인 경제적 성과 덕분에 군부정권이 퇴진하고 약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기조의 헌법이 유지돼왔다.
하지만 외형적 성장일 뿐 그 이면에는 민영화에 따른 고물가와 냉정한 시장 논리 앞에 배척된 사회적 약자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40년 만에 분출된 성난 민심은 브레이크가 없었고 이에 놀란 칠레 의회는 시위가 발생한 지 한 달 만인 지난해 11월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 시행 법안을 의결했다. 이로써 시위는 잠시 소강 국면을 맞이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코로나19가 지난 1월부터 칠레에서 급속도로 확산됐다. 국경이 봉쇄되고 국가 재난사태 선포와 무기한 통행금지 조치가 취해지며 학교와 상점마저 수개월째 폐쇄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심지어 중남미 1위 항공사였던 칠레 대표 기업 라탐항공마저 파산선고를 하게 됐고 3월 기준으로만 47만 명의 실직자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현 정부는 감염 위험과 민생현안 해결을 이유로 4월에 예정됐던 국민투표 연기를 의회에 요청했고 의회는 이를 의결했다.
그러나 여론은 심상치 않았다.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 문제가 주요 신문 지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가운데 칠레 정부에 맞선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됐고 야당의 압력도 상당했다. 온라인투표를 통해서라도 국민투표를 진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지만, 정부는 부정투표 우려를 이유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한 국민투표 연내 시행에 대해서도 코로나19 감염 위험과 시급한 민생현안 해결을 이유로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위대 가운데 칠레 군경이 발사한 고무탄에 눈을 맞아 실명 위기에 처한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면서 여론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섰다.
결국 정부는 9월에서야 오는 10월 25일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시행하는 것을 수용했다. 비로소 칠레는 40년간 유지된 현행 헌법의 개헌을 위한 첫걸음을 목전에 두게 된 것이다.
10월 개헌 국민투표 실시… 최종 개헌까지는 2년 정도 걸릴 전망
칠레 시민들이 개헌이라는 결실을 얻기까지는 아직 상당한 여정이 남아 있다. 올해 10월에 치러지는 국민투표는 두 가지 사항에 관한 것인데 첫째는 개헌 자체에 대한 찬반에 대해, 둘째는 개헌안 마련을 위한 제헌위원회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할지, 국회의원·민간인 각각 절반으로 구성할지에 대해 묻는다. 그 결과에 따라 향후 제헌위원회를 구성하는 선거가 있을 것이고, 최종 개헌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는 2022년에 시행될 예정이다. 현재의 시간표대로라면 개헌까지는 약 2년이 더 소요되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 진통도 상당히 수반될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여론조사 결과로 그 방향성을 충분히 예측해볼 수 있다. 최근까지 시행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칠레 시민 80%가 개헌을 찬성하고 있으며 완전히 새로운 제헌위원회 구성을 희망한다. 그 압도적인 수치만큼 칠레 시민들은 변화를 갈망하고 있고, 그 변화의 방향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있어서 정부 역할이 확대되는 방향임을 예상할 수 있다.
최근 40년 동안 각종 정책의 근간이 됐던 신자유주의 기반의 현행 헌법과 다소 차이가 있는 방향으로 개헌이 이뤄진다면 칠레 현대사의 상당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그동안 지치고 힘들었던 민심을 표와 맞바꾸기 위해 과도한 포퓰리즘을 내세우는 정치인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세계 5대 경제대국이었던 아르헨티나와 세계 석유 대국이었던 베네수엘라가 모두 포퓰리즘에 따른 과도한 복지 지출로 디폴트를 선언하고 빈곤국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지난 40년간 ‘중남미 최초의 OECD 국가’, ‘1인당 GDP가 중남미에서 가장 높은 나라’ 같은 외형적 성장을 이뤄온 칠레가 이번 개헌을 통해 국민의 삶과 밀접한 기초 서비스, 복지, 다양한 사회보장제도의 그물도 촘촘하게 메꿀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열어 보다 내실 있는 나라로 진일보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