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경제·정치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친 혼란의 시기다. 수학자 도인 파머(Doyne Farmer)가 처음 제시한 ‘혼돈의 가장자리(edge of chaos)’라는 말이 있다. 이후 스튜어트 카우프만(Stuart Kauffman) 펜실베니아대 교수는 혼돈의 가장자리 근처에서 진화(혁신)가 극대화된다는 모델을 소개했는데, 지금의 코로나19 상황이 그 혼돈의 가장자리다. 가장자리라는 것은 전쟁과 일시적 대형 재난 등과 같이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파괴되는 시대는 아니지만 생활·사회 전반에 걸친 혼돈을 의미하는 것이다. 카우프만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더 깊고 빠른 혁신이 일어나는 현상을 표현했다. 최근 실리콘밸리 글로벌 테크 기업들의 변화와 기술혁신이 ‘혼돈의 가장자리’ 시대에 실제로 어떻게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우리는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택트’ 현상, 초연결 기술 및 인프라 수요 폭증 유발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물가가 저렴한 다른 지역에서 원격근무하는 IT 기술자가 증가하고 있고, 이들에 대한 임금삭감 논의와 동일노동에 대한 차별적 임금에 대한 당사자들의 불만 등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테크 기업이 장기간 원격·재택 근무를 선언했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향후 10년 내 직원 절반은 재택근무를 할 것이라고 밝혔고, 트위터는 직원이 원할 경우 ‘평생 재택근무’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 외에도 구글 등 많은 기업이 내년 상반기까지 재택근무를 시행할 것이라고 이미 공언한 상태다. 실제로 최근 화상회의 관련 앱 사용량은 앱에 따라 적게는 10배에서 많게는 50배까지 폭증했다. ‘출근하지 않는 회사원’, 이것이야말로 직장인들의 꿈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이 일부 테크 기업에 국한된 현상인지, 아니면 같은 공간에서의 근무를 없애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대세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는 듯하다. 아직도 많은 기업은 코로나19 감염 단계 혹은 직종에 따라 사무실 근무를 선호하고 있고, 고객 밀접 서비스의 경우 근본적으로 재택근무가 불가능하거나 재택근무로 인해 비즈니스 전반에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일반차량 위에 레이더를 장착하고 도로를 질주하는 자율주행 관련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뉴스를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자율주행에 대한 관심은 코로나19 이전부터 높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더 커졌다. 상당한 매출 감소를 경험하고 있는 공유차량 관련 기업의 ‘자율주행 택시’ 개발은 물론, 물류·배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인 기술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LA 지역에서는 코로나19 상황에서 의료 및 방역 용품에 대한 로봇배송을 긴급 승인한 사례도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등장한 새로운 사회적 경향인 ‘언택트(untact)’ 현상은 자율주행 기술혁신 외에도 원격의료, 온라인 교육, 재택근무로 인한 초연결 시대로의 급격한 진입과 더불어 관련 기술 및 인프라 수요 폭증을 유발하고 있다. 특히 그간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로 주목받았던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서비스와 더불어 핵심 인프라인 5G와 데이터 처리를 원활하게 하는 고성능 컴퓨터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엇이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인가에 대해 정확히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다. 초기에는 AICBM(AI, IoT, Cloud, Big Data, Mobility)으로 축약해 관련 분야의 기술로 설명하다가 최근에는 DNA(Data, Network, AI)로 정의하기도 한다. 관련 기술 대부분이 소위 융복합적이면서도 상호 연결돼 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정의하든 상관없는 듯하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AI)만 해도 ‘핵심기술’인 클라우드·보안기술을 중심으로 데이터를 수집·분석·활용하기 위한 IoT, 빅데이터, 네트워크 등 연관된 융복합 기술로 장착된 ‘플랫폼’ 내에서 소비자(혹은 이용자)에게 문제 해결의 ‘솔루션’을 제공할 때 진정한 AI 기술 또는 서비스 구현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혼돈의 가장자리’ 시기에 실리콘밸리 기술 기업들은 문제 해결, 경제회복,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3단계 접근 전략을 시도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엄청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이 시기에 이미 많은 문제가 발생한 상황에서, 이들은 현재의 기술로 문제를 해결하는 1단계, 이를 통해 경제를 원래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2단계를 거쳐, 향후 새롭게 도래할 전반적인 패러다임 전환에 대비하고자 한다.
일례로 코로나19로 매장 내 대면 판매가 어려운 상황에서 일반적인 배송 방식과 함께 모바일 주문 후 매장 밖 보도 가장자리에서 물건을 수령하는 서비스(curbside pickup)를 도입하는 것이다. 즉 기존의 모바일 주문 기술을 사용하되 시간이 걸리는 배송 방식이 아닌 픽업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원래 수준으로 매출을 회복하며, 이후 혁신적인 판매 방식 혹은 마케팅 기법을 도입해 패러다임 전환을 도모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방식은 일상적인 생활서비스 분야만이 아니라 기술 분야에서의 혁신에서도 대동소이하다. 코로나19로 발생된 의료 분야의 문제 해결을 위해 의료산업의 구조개편과 비용절감을 통한 비대면서비스 활성화로 패러다임이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즉 현재의 문제점 해결을 위해서는 비대면 진료 등을 확대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치료가 아닌 진단·예방 중심의 산업구조로 재편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데이터를 수집·분석·예측하기 위해 AI를 활용하거나 건강진단 및 모니터링 솔루션 제공과 신약개발 등을 위해 새로운 방식의 데이터 수집·분석 분야의 기술혁신을 추진하는 것이다. 일례로 스탠포드대 정밀의료센터는 ‘스마트 화장실’을 통한 개인 건강정보 수집 및 분석 기술을 개발했다.
韓 기업, 서비스 개선과 융합상품 개발로 빠른 시장진입 가능 분야에 집중할 필요
그렇다면 우리 기업, 특히 중소·중견기업이나 관련 연구자들은 이러한 기술혁신에 어떻게 대응·적응해나갈 것인가? AI를 예로 들어보자. AI는 핵심기술·플랫폼·솔루션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모든 분야에서 우리 중소·중견기업이 기술적 우위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으나 현실적으로는 대규모 투자나 오랜 기간의 명성이 축적돼야 하는 핵심기술 분야로의 진입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중소·중견기업이 AI 분야에서 손 놓고 있자는 의미는 아니다. 비록 핵심기술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어렵겠지만, AI의 다양한 기술을 활용한 플랫폼을 구축하고 모델링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부분에서는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또한 AI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다른 산업 분야에서 솔루션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수도 있다. 즉 원천기술 개발을 통해 경쟁이 가능한 기업이 아니라면 서비스 개선 혹은 융합상품 개발을 통해 빠르게 시장진입이 가능한 분야에 집중하면서 더 다양하고 큰 시장을 위한 새로운 사업모델 및 제품을 개발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혼돈의 가장자리’ 시대에 빠르게 변화하고 준비하고 대응하는 우리 기업들의 모습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