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영국 과학자 뉴턴이 백색광을 분해해 일곱 색깔의 무지갯빛이 있음을 밝혀낸 이후 색은 많은 학자의 연구대상이 돼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자연에서 채취하는 재료만으로 만들던 염료도 화학 재료를 사용하면서 더욱더 다채로운 색깔을 만들 수 있게 됐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조합으로 만들어진 자연의 빛깔은 기준이 없어 만드는 곳마다 같은 이름 다른 색깔로 만들어지는 등 혼돈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른바 색의 춘추전국시대에 질서를 부여한 사람은 생물학도이자 화학도였던 로렌스 허버트(Lawrence Herbert)다.
허버트는 1956년 작은 인쇄회사 팬톤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시작했다. 의뢰받은 인쇄물에 제품의 색상을 정확히 일치시켜 인쇄하는 컬러 매칭 담당자였던 허버트는 일을 하면 할수록 잉크의 조색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기본 색상 60가지로 일일이 혼합해 만드는 일 자체도 힘들었지만, 잉크 제조사마다 색상을 만드는 기준이 달라 같은 이름의 잉크를 섞어도 다른 색이 돼버리곤 했다. 의뢰한 회사 담당자에게서 왜 이전과 같은 색을 낼 수 없느냐는 볼멘소리를 매번 들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는 화학의 원소기호처럼 색상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 색상으로 정리하고 조색하는 공식을 만들면 누구나 같은 색을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허버트는 기존의 60가지 기본 색상을 분석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색상 12개로 줄인 후 12색을 새로운 배합으로 조색하는 공식을 만들었다.
색을 정의하다
첫 번째 시도에 흥미로운 결과를 얻은 허버트는 1962년 팬톤을 인수하고 색을 표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다. 12가지 기본 색상을 다시 10가지로 더욱 단순화하고 500가지 색상을 낼 수 있는 배합법을 개발해 색상별로 특정번호까지 부여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기본 색상과 배합 공식을 가지고 허버트는 직접 잉크 제조사 21곳의 문을 두드린다. 팬톤에서 개발한 10가지 색소의 라이선스를 구매하고 저마다 제조하는 색상을 통일하자는 제안이었다. 20곳의 잉크 제조사가 팬톤의 라이선스 계약 제안을 수락함에 따라 1963년 ‘팬톤 매칭 시스템(PMS)’이 출시됐다.
팬톤 매칭 시스템의 출시로 인쇄소에서는 색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각 브랜드가 의뢰한 패키지 등을 항시 같은 색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됐다. 브랜드들도 이를 통해 소비자의 신뢰를 얻어 긍정적인 소비패턴이 형성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팬톤의 매칭 시스템이 긍정적인 결과를 얻자 팬톤은 확신을 갖고 1983년까지 인쇄 분야의 색상 수를 747개까지 확장했다. 1988년에는 패션과 홈 인테리어에서 사용되는 면의 형태로 2천여 색을 출시했고 1993년에는 플라스틱 색상 칩까지 내놨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자 모니터에서 표현되는 색상을 정리해 빛의 삼원색 ‘빨강(Red)’, ‘초록(Green)’, ‘파랑(Blue)’을 색상 값으로 정의하고 월드 와이드 웹에서 사용되는 표준언어 HTML에는 코드로 색상 값을 정의했다. 이로써 팬톤은 시대와 산업계 전반을 아우르는 색으로 된 언어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했다.
색이 만든 세상
브랜드에 대한 신뢰는 브랜드에 대한 친근함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믿지 못하는 사람과 친해질 수 없듯 브랜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친근함은 생기지 않는다. 브랜드가 친근해지면 사람들은 기억하고 선택한다. 팬톤은 변함없는 컬러로 브랜드들에 대한 신뢰를 이끌어내줬다. 기억하고 선택할 수 있는 색의 언어를 브랜드와 소비자에게 동시에 선사한 것이다.
1986년 팬톤은 잉크를 섞으며 색을 만들어내던 믹스 마스터들과 함께 색상 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원들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컬러 트렌드를 연구하기도 하고 컬러 이코노미스트 혹은 컬러 심리학자로 활동하며 색이라는 언어로 브랜드가 소비자와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컨설팅하고 있다.
팬톤은 매칭 시스템의 번호가 부여된 색상별로 일정 기간 소비된 양을 분석해 색상 트렌드 예측이 가능했기에 1993년부터 뉴욕 패션위크에 시즌별 색상 트렌드를 분석해 10대 색상을 발표했다. 2000년부터는 패션, 뷰티, 리빙 등 산업군별로 소비되는 색을 분석하고 그해의 분야별 이슈를 종합해 전 세계의 문화까지 반영하는 ‘올해의 색’을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색상 트렌드에 민감한 브랜드들은 해가 가기도 전에 팬톤과 손잡고 ‘올해의 색’이 적용된 신제품을 미리 만들어내 트렌드를 주도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색으로 빚어낸 팬톤의 언어가 다시 색을 빚어내고 있다. 브랜드는 소비자를 향해 여러 가지 언어로 대화할 수 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말, 글이기도 하고 숫자나 기호, 캐릭터일 수도 있다. 팬톤이 제시하는 것처럼 ‘색’도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다. 팬톤의 예시처럼 어떤 것이든 브랜드가 빚어낸 언어가 다시 브랜드를 빚어낸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