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들은 미술사를 전공하는 내가 유럽여행을 다니면 미술관에서 우아한 시간을 보낼 것으로 생각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림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것은 맞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체력과 지력의 극한을 요하는 힘든 과정으로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유럽 현지의 넘쳐나는 미술품을 한없이 보다 보면 점점 질리게 되는데 이런 일정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 주간 소화하다 보면 그야말로 심신이 피폐해진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질리는 법인데 미술 감상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그간의 나의 여행편력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을 손꼽으라면 2013년 여름답사다. 이때는 동료가 있었다. 바로 둘째 딸과 28일간 유럽을 돌아다닌 것이다. 당시 첫째 아이가 고3이라 둘째는 내가 맡아야 할 상황이었다. 나 혼자 다니기도 힘든데 혹까지 달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계획은 런던에서 파리를 거쳐 프랑스 남부 도시를 보고 비엔날레가 열리는 베네치아까지 간 다음 다시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구석기 유적을 답사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도록 짰다. 총 28일간 근 12개의 도시를 거치는 빡빡한 일정이었는데 이런 그랜드 투어를 중학교 1학년 딸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러 우여곡절 속에도 가장 큰 보람이라면 여행 마지막 단계에서 구석기 동굴벽화를 딸과 함께 마주한 순간이었다. 구석기 동굴벽화는 미술사 책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중요한 유적이지만 실제로 보지 못해 매번 아쉬웠다. 이 때문에 2013년 답사의 핵심으로 프랑스 중남부에 자리한 동굴벽화 유적지를 잡았다. 그리고 결국 여행을 떠난 지 20일 만에 루피냑(Rouffignac)이라는 동굴 속에서 딸과 함께 구석기인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게 됐다. 동굴 천장에 산양과 매머드 떼를 그린 태고의 그림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는데 이 순간을 딸과 함께할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 너무나 신비로운 세계에 딸도 크게 감동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이후 일정에도 딸과 티격태격하며 아슬아슬하게 여행을 이어나갔지만 이때 루피냑 동굴에서 보낸 시간은 나에게 미술의 힘을 오랫동안 일깨워줬고, 지금까지도 딸과 나의 심리적 연대의 큰 보루가 되곤 한다. 루피냑 동굴 같은 구석기 벽화는 원시 주술사가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주술사의 마법이 수만 년 후까지 영험한 힘을 발휘해 나를 미술사학자로서, 아버지로서 거듭나게 하는 마법 같은 순간을 체험하게 한 것은 아닌가 상상해본다.
이처럼 여행의 매력은 일상을 벗어나 도리어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 있다. 계속되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지난 여행 추억담을 꺼내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지금의 상황도 언젠가 추억으로 남게 될 수 있도록 이 위기가 잘 마무리되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