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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마음속에 아주 따뜻한 밥 한 끼를 품고 싶은 사람들에게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저자, 에세이스트 2020년 11월호



어느 날 우연히 튼 라디오에서 여행작가 노중훈이 첫 방송을 하는 것을 들었다. 매주 인상 깊은 식당 등을 소개하는 평범한 콘셉트의 코너였다. 평소 팟캐스트는 물론이고 라디오를 거의 듣지 않는 데다가 ‘맛집’이라든가 음식 이야기에 그리 흥미 있는 편이 아닌데도 어쩐지 그날부터 홀린 듯이 그가 나오는 목요일 아침마다 라디오를 찾아들었다. 어디서 웃음을 멈춰야 할지 모르겠는 그의 독보적인 입담의 힘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더 움직인 건 그 입담 속 어떤 찰나들이었다. 거침없이 말하는 듯하지만 혹시 이런 말은 누군가에게 누가 될까 염려한 듯 ‘분명 더 웃길 수 있는 찬스’라는 유혹적인 고지 직전에서 기꺼이 멈춰서는 찰나. 황당한 에피소드를 소개할 때도 이야기 속 주인공을 희화화하지 않고 ‘디그니티(dignity)’를 세워주는 한두 마디의 말을 덧붙이는 찰나. 그 찰나들 속에 고인 그의 진심.
무엇보다 그가 들려주는 노령의 밥집 주인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귀하고 귀했다. 그에게는 결코 (구매 권력을 갖고 있는) 소비자로서 (그 식당을 홍보해줄 수 있는 위치의) 방송인으로서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을) 젊은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시혜적인 태도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 싶게 없었고, 주인들의 인생역정이나 밥집의 역사를 신파적으로 과장하지도 않았고, ‘할매’ ‘할배’들의 눈높이에 맞추겠다고 다소 인위적인 구수한 말투를 구사하지도 않았고, ‘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식으로 대뜸 정(情)을 들이밀고 정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신중하고 담백했다(그가 식당문을 열고 들어갈 때 가끔씩 나는 그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온 사방으로 재빠르게 굴리면서도 조심조심 포복해서 들어가는 광경을 상상하고 혼자 웃곤 했다).
신중하고 담백한데 그 어디서도 듣기 힘든 노령의 밥집 주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진하게 우려내고야 만다. 그 적절한 거리감에서 나오는 엄청난 균형. 그 균형은 무언가를 정확하게 사랑하고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입담에 한참 웃다 보면 그 사랑과 존경이 어느새 마음에 스민다. 그 은근한 ‘스밈’ 덕분에 나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할매’들을, 누가 차려주는 음식들을, 오랜 세월 버텨온 것들이 갖고 있는 시간의 질서를, 사라지기 직전의 것들을 보다 성실하게 살펴보고 정확하게 존경하려고 노력하게 됐다.

한곳에 오래 머문 식당들, 위세 등등한 식당이 아니라 작고 허름하고 낮게 엎드린 동네 식당들, 그 식당을 오래 지킨 사람들, 그 사람들이 켜켜이 쌓아온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듣고 기록하고 나누는 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그 소사(小事)가 저에게는 대사(大事)였습니다. ‘할머니 식당’은 제게 우주입니다. -p.10

『할매, 밥 됩니까』에 담긴 27곳의 식당, 노중훈이기에 그 소중함을 기민하게 알아보고, 남다르게 경험하고, 고풍스러우면서도 익살맞은 문체로(‘고풍’과 ‘익살’의 균형도 어찌나 절묘한지) 기록해낸 그 ‘우주’들에서는 종종 자본주의 사회의 중력마저 작동하지 않는다. 자영업자로서 경제적 고비마다 그 가혹한 중력을 정통으로 맞아 생긴 부침들이 인생의 굴곡으로 이어져온 분들이, 아무런 계산도 사심도 없이 누군가에게 턱턱 내미는 무중력의 진심들 앞에서, 오직 진심과 진심이 부딪혀 빚어내는 웃기면서 찡한 순간들 앞에서, ‘할매’들과 할매들이 내어주는 밥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을 통해 너무나 송구한 밥들을 많이 먹었다. 밥값을 꼭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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