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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드리고의 카메라 로드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경계를 몸으로 지우는 순간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0년 11월호



‘범’을 소재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지난여름을 보냈다. 범은 고양이과 맹수인 호랑이와 표범 등을 아우르는 말이다. 과연 한국에 아직 범이 있는 것인지, 범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취재하는 다큐멘터리였다. 호랑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완전 자취를 감추었으나, 표범은 최근까지 심심찮게 목격담이 전해지고 있었다. 다만 표범으로 추정될 뿐이지 명확하게 확인된 경우는 없었다. 만약 표범이 한국에 아직 서식한다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강원도의 DMZ 일대였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DMZ를 여러 번 들락거려야 했는데 매번 여러 단계의 복잡한 허가 절차를 거쳐야 했다. 총을 든 군인들이 지키는 초소를 지나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DMZ 내에서의 촬영 허가를 얻긴 했으나 북한 쪽을 촬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특별한 허가가 있어야 했다. 우리 제작진은 오직 남한만 촬영할 수 있었는데, 나는 카메라를 세우기 전에 안내자에게 물어보는 일이 여러 번이었다. “저 산은 북한인가요? 남한인가요?” 첩첩산중이라 내가 보기엔 똑같이 생긴 봉우리들이 사방에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나로 죽 연결되는 능선인데, 이쪽은 남한이고 저쪽은 북한이어서 카메라조차 향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여겨졌다. 
한국은 사실상 섬이다. 국토의 삼면이 바다고 북쪽은 아시아 대륙과 이어져 있긴 하지만, 북한과의 대립 때문에 국경이 막혀 있다. 북한을 지나 중국, 러시아, 몽골 등을 거쳐 중앙아시아, 유럽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있지만 국경으로 막혀 있으니 사방이 고립된 섬과 마찬가지다. 땅의 고립은 곧 사고의 고립을 부른다. 다른 민족이 국경을 넘어 우리 안으로 자연스럽게 유입되지 못하고, 반대로 우리가 국경을 넘어 자연스럽게 다른 문화로 흘러들어 가지도 못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은 관용에 인색하고 획일주의가 만연한 사회가 돼간다. 자신과 생각이 조금 다르면 즉시 타자로 만들어 대립하고 배척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 흔하다. 내가 여행했던 여러 나라는 국민들의 민족, 문화, 종교, 언어가 각각 다른 경우가 많았다. 같은 나라 사람인데도 모어가 달라서 제3의 외국어로 대화하는 일도 흔했다. 피부색이 다르고 민족과 언어가 달라도 그들은 다 같은 한 나라의 국민이었다.



내가 여행에 빠져들게 된 것은 국경을 넘는 재미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니까. 걸어서 다른 나라로 갈 때면 여전히 초보 여행자처럼 설레고 흥분된다. 불과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사람들의 말과 문화가 달라지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더욱 신기한 것은 그 반대의 경우다. 분명 국경을 넘었는데도, 국경의 이쪽과 저쪽에서 같은 민족의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고 문화도 같을 때 말이다. 중국과 몽골의 국경이 그런 경우였다. 두 나라의 국경을 통과할 때는 어떠한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국경을 맞댄 중국 쪽 지명은 네이멍구(내몽골)였다. 똑같이 생긴 몽골 사람들이 국경의 양쪽에서 같은 언어로 말을 했고, 모래바람 날리는 황량한 풍경 또한 양쪽이 같았다. 민족이 같고 언어가 같으니 풍속 또한 같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나는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는데, 두 나라의 철로 폭이 달라서 기차의 바퀴를 갈아 끼우는 것만이 내가 국경을 넘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협궤용 바퀴를 광궤에 맞는 바퀴로 갈아 끼우는 몇 시간 동안 무심히 객실에 앉아 있던 나는 국경이 개념뿐인 허상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중국과 몽골 국경 양쪽엔 유목민의 거처가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선조 때부터 거기에 살며 말을 몰고, 양을 키우며 들판을 자유롭게 누비던 몽골 고원의 유목민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몽골 국민과 중국 국민으로 나뉘었을 것이다. 유목민 김 씨는 그저 양에게 풀을 잘 먹이고, 좋은 아내를 만나 아이를 낳고 가족과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을 바랐다. 그런데 몽골과 중국의 국경이 나뉘던 날, 유목민 김 씨에게 몽골 국민 될래, 중국 국민 될래 물어봤다면 김 씨는 그저 송경동 시인의 시구처럼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답했을 것만 같았다.
국경을 넘는 여행은 국가주의를 허무는 작은 퍼포먼스 같다. 세계의 많은 나라가 조금이라도 더 넓히려고 혈안이 돼 있는 국경선을 몸으로 넘어 다른 나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은 유난히도 흥겹고 가볍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경계인 국경선을 몸으로 지우는 순간이니까. 세계의 모든 나라는 국경이라는 경계선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실재하는 선이 아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자연의 땅 위에는 아무런 경계선이 없다. 국경은 오직 지도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경계선일 뿐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허락 없이 그 선을 넘는다면 당장에 총구가 겨눠진다. 새나 짐승이 지나갈 때는 그러지 않는데 말이다.
DMZ에는 몇몇 연구자가 설치해놓은 수백 대의 무인카메라가 있다. 센서가 달려 있어서 카메라 앞으로 동물이 지나가면 그 순간에 사진과 영상이 촬영된다. 연구자들은 시베리아와 연해주의 범들이 북한 땅을 지나 남한까지 내려올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지난여름 내가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까지는 범이 촬영되진 않았고 기껏해야 삵이나 사향노루 정도가 무인카메라에 담겨 있었다. 나도 그들 연구자처럼 시베리아와 연해주의 범들이 두 번의 국경을 넘어 남한까지 내려와 무인카메라에 담기기를 바란다. 또한 범으로부터 우리 인간이 배워 가상의 경계선인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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