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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의 신나는 시네
삶은 계속된다, 자라는 이처럼
허남웅 영화평론가 2020년 11월호


사람은 누구나 ‘유치(milk tooth)’를 뽑는다. 윗니면 지붕에 던져, 아랫니면 아궁이에 넣어, 두 손 모아 신체 건강하게 자라도록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 평생 큰 병 걱정 안 하고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의지가 생긴다. 그러니까, 발치하는 아픔이 없으면 성장도 없다는 얘기다. 유치를 뽑는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모 가수는 후에 어른으로 성장해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노래까지 부르지 않았던가. 믿거나 말거나.

소녀, 청년을 만나다
밀라(일라이자 스캔런)는 역으로 들어오는 지하철로 서서히 몸을 밀어붙인다. 지하철에 치여 죽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투다. 그때 갑자기 허우대는 멀쩡한데 하는 짓은 영 ‘병맛’인 소년이, 아니 소년이라기에는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청년이 밀라를 지나쳐 뛰어가더니 지하철과 막 충돌하려는 순간, 멈춰 선다. 어머나 세상에! 밀라는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밀라가 따귀라도 날리는 줄 알았는데 청년을 바라보는 표정이 꿈속의 왕자님을 대면한 듯 멍해 있다. 금세 사랑에라도 빠질 기색이다. 청년은 밀라의 금발 머리를 보고 “너 머리가 금팔찌 같아” 얘기하니 벌써 이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청년의 이름은 모지스(토비 월레스)다. 얼굴에는 잔 상처가, 머리에는 ‘땜빵’이, 몸에는 문신이 가득한 모지스는 개차반이다. 마약이나 팔고, 안 팔리면 그 자신이 흡입하는, 될 대로 되라 인생이다. 
밀라는 모지스 같은 남자가 처음이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밀라는 또래의 남자와 사귄 경험도 없고, 아빠는 아픈 딸을 귀한 도자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대한다. 인큐베이터에 갇혀 지내듯 해야 하는 처지가 한스럽다. 죽기 전에 뜨거운 사랑 한번 해봤으면 소원하던 차에 모지스가 나타나 밀라의 손을 잡고는 세상 밖으로 이끌어 이리저리 데리고 다닌다. 날 이렇게 함부로 대한 남자는 자기가 처음이야, 밀라는 살아 있다는 것의 희열을 처음으로 감각한다. 
<베이비티스>를 연출한 이는 섀넌 머피다. 섀넌 머피 감독은 <킬링 이브>(의 시즌 3 에피소드 5, 6) 연출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킬링 이브>는 매력적인 사이코패스 킬러와 평범해 보이는 영국 정보부 요원의 추격을 섹시하게 다룬 시리즈 드라마다.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의 상반된 매력을 조화롭게 매치하는 <킬링 이브>의 연출을 살려 섀넌 머피는 <베이비티스>를 날카로우면서 따뜻하고, 달콤하면서 따끔한 성장담으로 완성했다.



아프니까 성장이다 
밀라에게 모지스는 ‘발치기(拔齒器)’와 같은 존재다. 밀라는 흔들리는 이를 뽑는 심정으로 시한부 인생을 마치고 싶지만, 헌신하는 부모의 노고 때문에라도 유치를 달고 살아야 하는 처지다. 지금 아프더라도 어떻게든 삶을 지속해 후에 치료가 되는 기적을 바라는 부모님과 다르게 밀라는 죽고 싶은 심정이다. 약을 먹으면 병든 닭처럼 침대에서 몽롱하게 누워 있어야 하고 약을 먹지 않으면 정상적인 삶이 힘든 밀라에게는 살아 있는 게 고통이다. 
얼마 남지 않은 삶 동안 술 마시고 노래하고 담배 피는 일탈을 하고 싶다. 죽을병에 걸렸다고 마냥 보호받으며 수동적인 안락에 안주하기보다 병증이 악화하더라도 짧은 순간이나마 밀라 자신이 주인이 돼 살아가는 짜릿함을 맛보고 싶다. 밀라가 모지스에게서 본 건 부모의 보호와는 차원이 다른 선을 넘는 경험의 짜릿함이었다. <베이비티스>는 밀라가 모지스와의 사랑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와 즐기는 짧은 동안을 발치의 고통에 비유한다.
고통을 즐긴다는 건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문장이 의도하는 뉘앙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유치를 뽑아야 그 자리에 더 단단한 이가 자라는 이치다. 밀라는 세상의 끝이자 또 다른 세상이 시작되는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서 밀려왔다 쓸려가는 파도를 보고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끝이면서 생의 시작이다. 짧게 살았다고 아쉽지는 않다. 삶과 죽음의 미스터리한 상관관계를 푼 것만 해도 성장이 무언지를 알았다. 밀라는 죽음으로써 성장했다. 
성장은 밀라만 한 게 아니다. 밀라의 죽음이 당장에는 부모님과 모지스의 마음을 아프게 할 테지만, 밀라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다시 삶을 이어가며 이들 또한 성장할 것이다. 유치는 젖니이기도 하다. 젖니는 영어로 ‘베이비티스(baby teeth)’다. 젖먹이의 갈지 않은 이를 지칭한다. 이 영화의 맥락상 밀라의 부모님과 모지스가 밀라의 죽음 이후 맞게 될 삶은 조금씩 다시 자라게 될 이, 또 하나의 베이비티스다. 이게 자라면 영구치가 된다. 잊지 못할 기억과 경험을 선사한 밀라는 이들의 마음속에 영구치가 돼 계속 자라고 삶을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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