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으로 건더뛰기

모바일 대메뉴명

KDI 경제정보센터

16개 경제부처가 만드는
국내 유일의 경제 정책 정보지

나라경제

발행물

칼럼

로드리고의 카메라 로드
세상 어디든 여행지가 아닌 곳이 없고 배움터가 아닌 곳이 없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0년 12월호

 

나는 이런저런 촬영을 하며 먹고사는 사람이다. 혼자서는 들기조차 힘든 육중한 카메라 장비로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영화나 드라마를 찍기도 하고, 때로는 혼자서 운용하기 딱 맞춤인 작은 장비들로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정말로 카메라와 렌즈 하나만 달랑 들고 사진 찍는 일을 하기도 한다. 무엇을 촬영하는가에 따라 장비는 바뀌지만 끝내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촬영하기 위해선 일단 길을 나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하지 않는 기간에는 여지없이 여행을 떠나기에 또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니 평생을 돌아다니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나의 삶은 책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한 달에 한 번, 책상에 앉아서 여행에 관한 원고를 쓰는 시간은 나에겐 일탈 비슷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여행이란 것 자체가 일상을 잠시 멈추고 일탈의 시간을 가지는 것 아니던가. 일탈은 일상에 활력을 준다. 매달 가졌던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을 무려 3년 동안 누렸는데, 이제 마지막 원고를 쓰게 됐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을 딱 이럴 때 쓰는 모양이다. 섭섭한 마음이 먼저 들지만 시원한 마음도 크다. 최근 몇 달 사이에는 글감이 너무 없어서 머리를 쥐어뜯기도 했었으니. 무엇보다 코로나 시국에 여행을 말한다는 것이 민망했는데 이제 그만 쓰게 됐으니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도 인다. 며칠 전 새삼스럽게 그동안 쓴 원고를 모두 꺼내 읽어봤다. 글의 큰 특징으로 여행지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 보였다. 굳이 쓸 필요를 못 느꼈던 것 같다. 세상엔 이미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다루는 글이 넘쳐나니까. 검색창에 도시 이름 하나만 쳐도 역사는 물론이고 필수 방문지, 맛집,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는 장소, 심지어 택시 요금까지 깨알 같은 정보가 쏟아진다. 나는 주로 여행을 하며 생각했던 것들을 썼다. 이제 연재를 마치게 됐으니 이번 달에는 보다 근본적인 주제인 ‘여행’에 대해 써보려 한다. 나는 도대체 왜 그렇게 여행을 다녔던 것일까? 도대체 여행이 무엇이길래.


 


어렸을 적의 나는 다분히 반항적이어서 그랬는지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학생 개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마뜩잖았다. 늘 학교를 뛰쳐나가기 위해 애썼지만 번번이 선생님과 부모님의 만류에 부딪쳐 억지로 학교를 다녔다. 그렇다고 공부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늘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세상의 모든 지식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 수능시험을 보고 점수에 맞춰 대학교에 들어가긴 했는데, 한 학기를 마저 다니지 못하고 자퇴를 했다. 그 길로 나는 영화판을 찾아가 말단 스태프가 됐다. 그때부터 영화 한 편을 마치면 다음 영화가 시작되기까지의 공백 기간에는 줄곧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다녀보니 나와 다른 풍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나에게 백배의 바가지를 씌운 인도의 사기꾼 릭샤 운전사도, 국경을 넘는 장거리 버스에서 먹거리를 나눠주던 중국의 촌로도, 내게 잠자리를 내어준 파키스탄의 이재민도, 심지어 내 카메라를 훔쳐간 방글라데시의 도둑까지 여행에서 만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내게는 선생님이었다. 여행을 통해 조금씩 세상을 바라보는 주관을 가지게 됐고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만나 새로운 삶의 태도를 가진다는 측면에서 여행과 공부는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내게 여행은 학교였고 공부였다. 학기마다 수백만 원씩 내야 하는 학자금이라 생각하고 아낌없이 여행을 다니며 청춘을 보냈다. 하지만 공부에는 끝이 없는 법. 그래서 중년이 된 지금도 끊임없이 여행을 다닌다. 그리고 노년이 되면 더욱 열심히 다닐 심산이다. 
평생 여행을 끌어안고 살기 위해서는 여행이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 돼야 한다. 달리 말해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지워야 하는 것이다. 서울의 일상을 살면서도 때로는 여행하는 마음으로,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는 마음으로 여의도 벚꽃 나들이에 나서고, 가을의 정동길도 걸어봐야 한다. 가끔은 대학로의 저렴한 연극 공연도 보고, 시립미술관에도 가보고, 북한산의 백운대에도 올라보고. 반대로 여행지에서는 과도한 기대나 환상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저 일상의 하루를 살아가듯이 가볍게 하루를 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여행지에서 적당량의 업무를 보는 것마저도 나는 찬성이다. 오전 내내 늦잠을 자는 것도 좋고, 밤늦게까지 소설을 읽는 것도 좋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허투루 쓴 듯해 당장엔 아까운 마음이 들지 모르겠지만, 평생을 여행자로 살아가고 싶다면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 더욱 중요하므로.
코로나 시국을 대단히 비관적으로 전망하지 않더라도,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된다 해도 예전처럼 마음껏 여행을 다니기까지는 한참 걸릴 것이다. 우리 인류가 아주 불운하다면 가까운 미래에 더욱 지독한 코로나바이러스가 나타날지도 모르고. 여행을 욕망하는 모든 사람이 당분간은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매야 할 것 같다. 나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요즘 하나같이 나를 걱정해준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못 가서 어떡하냐고. 사실은 나도 이렇게 오랫동안 여행을 가지 못한 게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은 당황스럽지만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다. 이미 오래전부터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지우는 데에 골몰해왔으니. 그래서 나에게 안부를 물어준 모두에게 답한다. 진정한 여행 고수에게는 세상 어디든 여행지가 아닌 곳이 없고, 배움터가 아닌 곳이 없다고. 
KDI 경제정보센터